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한국 영화의 눈물 사용법

동화와 소설만큼 오해되는 말이 또 있을까? 우리는 거짓말 같은 이야기, 허황한 이야기를 두고 소설 같다고 말한다. 심지어, 그것이 지나치게 예쁘거나 아름다울 때는 동화 같다고 덧붙인다. 동화 같다는 말은 마치 애들은 몰라, 라고 하며 울타리를 치고 어른들끼리 은어를 말할 때, 그 아이들이나 믿을 만한 세계를 가리킨다. 성숙한 어른이 되면 결별해야만 하는 유아적 허구의 세계, 그런 게 바로 동화의 공간이다. 그러나 한편, 동화 같다는 말을 어른들이 쓸 땐 그 의미가 또 달라진다. 어른 세계의 협잡이나 배신이 없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세계, 스노볼 속 공간처럼 아름답게 보존된 세계를 동화라고 부르니 말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진짜 소설의 세계는 허황하지 않고 진짜 동화의 공간은 아름답지만은 않다. 오히려 어른들이 윤리나 질서와 같은 말로 포장한 그 거짓을 낱낱이 벗긴 진실에 더 가깝다. ‘동화 같은’ 동화는 그러니까, 어른들이 필요할 때 갖다 쓰는 일종의 수식어에 불과하다. 샤를 페로의 동화에 나오는 ‘푸른 수염’을 어떻게 순수하다고 말할 수 있고, 안데르센의 ‘인어공주’를 어떻게 아름답다고만 말할 수 있을까?

좋은 이야기는 세상의 모순을 숨기는 게 아니라 드러내되 그것에 거리를 두고 생각할 수 있게 한다. 인어공주는 왜 끝까지 사랑하는 왕자를 지켜야 했을까, 왜 사실을 말하거나 자신의 목숨부터 이기적으로 지키지 않았을까 질문하면, 세상은 하나의 큰 의문 덩어리로 다가온다. 그렇게 서럽지만 아름다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세상살이의 한 조각씩을 삼키는 것이다.

최근 한국 영화 광고에서 종종 목격하게 되는 단어, ‘감동’도 그러하다. ‘감동’이란 무엇일까? 문자 그대로 해석해보자면 감정이 움직이는 것일 터이다. 그렇다면 감정이란 무엇일까? 시카고대학의 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을 인용해 감동이란 “지형학적 융기”라고 말한다. 감정은 우리 삶이 울퉁불퉁하고, 불확실하며, 언제든지 정반대로 돌변할 수 있음을 가르쳐준다. 그러므로 감동이란 평지가 산으로 융기하고, 화산이 분화하는 것과 같은 어마어마한 극적 변화인 셈이다.

이런 맥락에서 감동은 단순히 눈물을 흘리는 행위로 수렴될 수 없다. 어떤 연인이 전쟁으로 인해 헤어지고, 아이가 불치병에 걸려 일찍 세상을 뜨는 것과 같은 상황 가운데서 그저 눈물을 흘리는 것은 진짜 감동이라 부르기 어렵다. 진짜 눈물은 진짜 감동으로부터 나온다. 우리가 눈을 감지 않고 한 곳만을 응시해서 흐르는 물리적인 눈물이나 파블로프의 개처럼 문화적 학습을 통해 반사적으로 흘리는 눈물은 여기서 말하는 감동의 눈물과 거리가 멀다. 감동의 눈물은 그렇게 쉽게 써서는 안된다. 윤동주가, 시가 쉽게 쓰여져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영화 <오빠생각>의 한 장면.


이한 감독이 연출한 <오빠생각>의 광고 문구는 2016년 첫 번째 감동대작이다. <오빠생각>의 시대적 배경은 한국전쟁기다. 영화는 전쟁 중 고아가 된 아이들과 전쟁으로 인해 정신적 상처를 갖게 된 한 남자를 그리고 있다. 부모 잃은 아이들과 가족을 잃은 남자는 합창을 통해 잃어버린 감성을 되찾고, 상처를 회복해 나간다. <오빠생각>은 말 그대로 동화 같은 세상을 그린다. 앞서 말한, 진짜 동화가 아니라 ‘동화 같은’ 세계란 점에서 말이다.

<오빠생각>에는 악인이 등장하지 않는다. 배우 이희준이 맡은 갈고리는 얼핏 보면 아이들을 괴롭히는 악인처럼 보인다. 하지만 결정적 순간 그의 악은 전쟁으로 인한 인간적 약점으로 희석된다. 아이들을 착취하고, 괴롭히던 갈고리의 본심은 약간 당혹스러울 정도다. 그렇다면, 영화 속 악은 어디에 있을까? 악은 그들 내부가 아니라 외부, 즉 북한군이 곧 악이다. <오빠생각>에서 감동은 관객을 울린다는 것과 동의어로 쓰인다. 문제는 관객이 왜 우는가다. 여러 명의 아이들이 등장하고 아이들 중 한 명이 죽는다. 그것도 그들 주변의 갈고리가 아니라 북한군이 우연히 쏜 총에 의해 아이가 죽는다. 관객들은 아이의 죽음 앞에 눈물을 흘리게끔 된다. 아이는 죄가 없고, 무엇보다 너무 어리다.

중요한 것은 이 눈물이 서사적 관습 가운데 설계된 감동이라는 점이다. 아이의 죽음은 방아쇠로 작용해, 관객의 눈물을 터뜨린다. 그것이 돌발적이거나 우연적인 것은 관객에게 큰 의미가 없다. 한 아이가 죽었고, 그러므로 눈물을 흘려 마땅하다. 아이가 죽었는데, 게다가 북한군의 총에 맞아 죽었는데, 어찌 울지 않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이 눈물은 과연 ‘감정의 융기’를 가져오는 것일까? 그러니까, 이 눈물을 흘림으로써 영화관 밖의 세상에 대해 조금 다른 시각을 갖게 되고, 전쟁 중 희생된 어린 영혼에 대한 안타까움을 갖게 될까? 아니, 지금도 우리 주변에 방치되어 있을 아이들에 대해 진심어린 관심을 갖게 될까?

감동이란 감정의 변화를 거쳐 지금껏 보아왔던 세상의 다른 이면을 보는 경험의 기적이다. 진짜 눈물을 흘리고 진짜 감동을 겪은 후, 마음의 지형은 변화할 수밖에 없다. 화산이 폭발해 땅이 변화하고, 평지가 융기해 산이 되듯이 그렇기에 진짜 감동이란 곧 사랑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진짜 감동을 한다면, 그리고 진짜 눈물을 흘린다면 사람은 바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래서 감동을 연민으로 여겼다. 다른 사람의 불행이나 괴로움을 마치 내 것처럼 고통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 연민이다. 감동과 연민은 세상에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한다. 진짜 감동은 영화 속 사건을 남의 것으로 여겨 마음 놓고 눈물을 흘리는 단순한 배설이 아니라 그 사건을 내 것처럼 여기는 동화 과정을 통해 빚어진다. 그래서, 진짜 눈물은 책임을 요구한다. 내 탓이 아니지만 마치 내 탓처럼 여겨지는 고통 끝에 눈물이 흐른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짜 눈물인 셈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저 감동을 고작 서푼짜리 정서적 배설로 써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눈물을 사용해 후련한 일탈을 경험하는 것, 그런 것을 지금 감동이라 후려치는 것은 아닐까? 정서적 반사작용이 된 눈물, 최근 한국 영화의 눈물 사용법이 그렇지 않은가 싶다.



강유정 | 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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