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나이듦의 자리

신라의 어느 사내 진땀 흘리며

계집과 수풀에서 그 짓 하고 있다가

떨어지는 홍시에 마음이 쏠려

또그르르 그만 그리로 굴러가버리듯

나도 이젠 고초롬만 살았으면 싶어라.

쏘내기속 청송 방울

약으로 보고 있다가

어쩌면 고로초롬은 될법도 해라.

-서정주, ‘질마재신화 중 우중유제(雨中有題)’ 1975

환갑을 맞았던 1915년생 시인 서정주는 1975년 <질마재신화>를 출간한다. 이 시집에는 유독 회갑(回甲)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회갑동일(回甲冬日)’이라는 작품에서 시인은 “가고파 갈 곳도 없는 회갑(回甲)해 겨울날은/ 내 어릴적 안아주던 할머니품 그리워/ 쉬운해전 세상뜬 할머니 친정 마을에 들다”라고 노래한다.

그중 ‘우중유제’는 특히 이제는 회갑, 살 만큼 살았으니 세상사에 아등바등 않고 넉넉히 살다 이 세상을 떠나겠다는, 어른 특유의 여유와 지혜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회갑이면 그러니까 육십 살쯤 먹게 되면, 그저 떨어지는 홍시에 마음에 쏠려 또그르르 굴러가듯, ‘고초롬만 살’아도 괜찮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서정주의 이러한 여유는 심정적 포즈였던 듯싶다. 그는 이후 더 왕성한 활동을 보였고, 유력한 거장으로서 지위를 누렸고, 사회·정치적 발언에서도 빠지지 않았다. 몇몇은 하지 않았으면 더 나았을 법한 발언도 있다.

세계 여행기를 비롯한 몇 편의 시집을 더 내고 2000년 여든다섯의 나이로 그는 세상을 떠났다. ‘고초롬만 살’겠다 했지만 이십여년을 더 이 풍진 세상의 먼지 속에 머물다 떠난 것이다.

말이 쉽지, 고초롬만 사는 게 쉽지가 않다. 나이를 먹어, 이제 세상의 순리를 알게 되었으니, 욕심을 버리고 훌훌 초연한 세계로 간다는 게 쉽지 않다는 의미다. 조선왕조에는 기로소(耆老所)라는 기관이 있었다고 한다. 나이가 들어 은퇴한 벼슬아치들의 친목기구였는데, 문과 출신 정2품 이상으로 나이 70 이상인 사람만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세상에 나가 이름을 얻고 장수의 복까지 타고난 사람들만이 기로소에 들 수 있었던 것이다. 역사학자 전우용의 말처럼 여기에 입소하는 것은 곧 하늘로부터 아낌없는 복을 받았다 여겼을 만하다.


고희는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는 두보의 ‘곡강시’에서 유래한 말인데, 글자 그대로 풀이하자면 드물게 오래 산 사람을 의미한다. 일흔까지 산다는 것을 ‘고희연’으로 축하한 까닭은 단순히 오래 살아서가 아니라 그만큼 건강히, 오래 살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평균 수명이 고작 35세였다고 하니 일흔이란 얼마나 진귀한 나이였을까? 물론 압도적으로 높은 영·유아 사망률 때문에 평균이 깎였다 하더라도, 지금처럼 장수하는 어른이 많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1983년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이 만든 영화 <나라야마부시코(楢山節考)>는 어느 산골마을의 기로(棄老) 전설을 소재로 삼고 있다. 이 작품은 후가사와 시치로(深澤七郞)가 쓴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1958년 전후 일본에 소개된 이 작품은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모던하고, 자폐적인 사소설이 주류를 형성했던 일본 문학계에 <나라야마부시코>는 야성적이면서도 활력 있는 서사의 복귀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런 소설의 출현을 위해 50년을 기다려왔다”고 말할 정도였다.


<나라야마부시코>의 줄거리는 가야 할 때를 아는 노인의 아름다움으로 요약된다.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 마을에서는 할 일을 다 마친 노인이 오래 사는 것을 죄악으로 여겼다. 심지어 증손자를 볼 때까지 살아 있다면 그 노인은 쥐새끼를 낳았다며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았다. 올해 예순아홉이 된 오린은 아직 빠진 이가 하나도 없자, 이를 부끄럽게 여겨 부싯돌로 때리고 마침내 절구에 내리찧어 두 개를 부러뜨린다. 그러고서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이가 빠져 졸참나무산에 갈 때가 되었다며 온 동네를 춤을 추며 다닌다.

오린은 졸참나무산에 가지 않으려고 아들의 지게에 매달리는 옆집 노인을 안타깝게 여긴다. 아들, 손주 다 결혼시키고 증손주까지 볼 판인데, 여자들이 둘이나 되는 집에 노인이 남아 할 일이라곤 귀한 곡식을 축내는 것 말고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린은 졸참나무산에 가는 것을 기꺼이 기다리며 하루빨리 그날이 오라며 성대한 잔칫상도 마련해둔다. 할머니 덕분에 귀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기뻐할 자식들을 생각하니, 오린은 그저 싱글벙글이다.

우리의 예상과 달리, <나라야마부시코>에 그려진 기로풍습은 노인을 갖다버리는 패륜의 야만이 아니다. 먹을 것이 너무도 부족하고 귀하던 시절, 영생이란 나의 유전자 복제물을 가지고 태어날 아이를 통해 이루어질 미래의 꿈이었다. 건강한 아이를 낳고, 또 그 아이가 아이를 낳으면, 난 그 유전자 속에서 영원을 누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 태어날 아이를 기대하며 졸참나무산으로 가는 오린이 행복하고 기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고려장과 같은 기로풍습이 있었다면, 그것은 패륜이 널리 퍼져서가 아니라 그것이 문화가 될 수밖에 없었던 사회·경제적 맥락이 있었음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

‘노인은 늙지 않는다’ ‘프랑스 여자는 늙지 않는다’ ‘자네 늙어봤나, 나는 젊어봤네’와 같은 노년 마케팅이 한창이다. 철학도, 소설도, 영화도, 드라마도 늙음을 분석하고, 추적하고, 위로하고, 찬양한다. 누구나 늙는다. 늙는 것은 가능한 미래가 아니라 분명한 결말이다. 중요한 것은 늙음의 자리다. 늙는 것은 사회적 맥락 가운데에 있다. 과연 우리에게 늙음은 무엇일까? 늙음을 소비하는 문화가 아니라 그것을 정말 사유하는 문화가 필요하다.



강유정 | 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