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호모 사피엔스에게 겸손을!

리어나도 디캐프리오는 영화 <레버넌트>에서 들짐승의 생간을 꺼내먹는다. 배역인 휴 글래스가 먹는 거지만 디캐프리오는 직접 연기했다. 문제는 디캐프리오가 채식주의자라는 점이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했다. “평소라면 들짐승의 생간 같은 건 입에도 안 대겠지만, 휴 글래스에게 그건 생존 본능이었다.” 그렇다. 본능, 이었다. 유발 하라리가 쓴 빅 히스토리 <사피엔스>를 보면 인류 아니 호모 사피엔스는 원래 수렵채집인이었다. 사나흘에 한 번 사냥에 나서 하루 세 시간에서 여섯 시간 정도 채집하면 무리 전체가 먹고살았다. 휴 글래스는 대자연 속의 위기 상황에 처하자 자신의 유전자에 새겨져 있던 수렵채집인으로서의 능력을 십분 발휘한다. 어쩌면 이 말은 지적 설계의 맨 꼭대기에 위치하고 있다고 믿는 우리, 인류가 여전히 동물의 한 종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레버넌트>의 감독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시도는 ‘원시 호모 사피엔스 되기’처럼 보인다. <레버넌트>는 19세기 무렵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레버넌트>에서 보여주는 북아메리카의 풍경은 우리가 익히 알아왔던 초기 미국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높은 수익을 주는 비버나 버펄로의 가죽을 얻으려 모여든 모피 사냥꾼들의 행색도 그렇다. 그들은 문명인이라기보다는 수렵채집기의 호모 사피엔스와 더 닮아 보인다.

<레버넌트>의 배경은 굳이 말하자면 미국이지만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모두가 평등하며 누구나 다 생명권, 자유권,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고 말하는 독립선언서의 주체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자유권, 생명권, 행복추구권 따위를 말하다가는 좀 더 힘이 센 다른 동물의 공격을 받아 목숨을 잃고 말 듯싶다.<레버넌트>의 시작은 매우 인간적이다. 모피 사냥꾼들은 북미 대륙에 널려 있는 들소와 비버의 가죽을 벗기느라 여념 없다. 그런데, 원주민들이 사냥꾼들을 공격한다. 공격을 피해 그들은 편안한 뱃길을 버리고 험악한 산길을 선택하게 된다. 제 몸 하나 가누기 힘든 산길이지만 사냥꾼들은 모피를 포기하지 않는다. 인간적이라는 건 바로 이런 뜻이다. 그 어떤 동물도 이윤이 된다고 해서 목숨을 걸고 다른 짐승의 가죽 따위를 메고 산을 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그런다. 돈이 되니까 목숨도 하찮게 보고, 돈이 된다면 위협은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영화 <레버넌트>의 한 장면.


그런데, 이때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등장한다. 길 안내자였던 휴 글래스가 곰에게 공격을 당했기 때문이다. 휴 글래스는 이내 이동의 짐이 되고 만다. 처음 무리는 문화인처럼 군다. 휴 글래스를 데리고 가니 말이다. 하지만 네 발로 기어야 하는 절벽 앞에 이르러 대장은 포상금을 걸고 지원자를 받는다. 휴 글래스가 눈을 감을 때까지 곁에 머물다가 장례를 치르고 오라, 그러면 두둑한 포상금을 지급하겠노라고 말이다. 그래서 아들을 비롯한 세 명의 남자가 휴 글래스 곁에 남게 된다. 문제는, 그중의 어떤 ‘사람’은 돈만을 탐내는 인간이라는 점이다. 마침내 돈만 탐이 났던 그 ‘인간’은 아버지를 지키려는 아들을 죽이고 아버지 휴마저도 가매장한 채 떠나버린다. 이후 아버지 휴는 여러 번의 위기를 극복하며 기지로 돌아와 아들을 죽인 남자에게 복수를 하게 된다.

여기서 다시 한번 돌아봐야 할 장면이 있다. 곰이 왜 그를 공격했는가, 그 이유 말이다. 영화 속에서 곰은 새끼들과 함께 있다. 회색곰은 새끼를 지키기 위해 새끼보다 더 큰 몸집의 휴 글래스를 공격한 것이다. 여기에 아예 첫 장면, 원주민들이 사냥꾼을 에워싸고 공격한 이유도 연관된다. 그들을 공격했던 리 족은 사실 부족의 딸이 납치를 당하자 그녀를 찾기 위해 외지인들을 공격했다. 말하자면 휴, 곰, 리 족 모두 자신의 자손을 위해 공격하고 복수한다. 새끼를 보호하고 되찾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자면 곰이나 휴나 원주민이나 다를 바 없다. 그건, 바로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남기려는 본능적인 동물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휴 글래스가 되돌아오는 과정이 북극곰의 생태를 다루는 자연 다큐멘터리와 닮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눈 덮인 설산과 계곡을 헤매며 300㎞를 견뎌내는 ‘휴’는 대자연 속에서 생존해내야만 하는 동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새끼를 걱정했던 곰처럼 아들을 잃은 휴는 인간적이라기보다는 동물적이다.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만난 원주민이 복수는 신의 뜻이라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휴의 복수는 이윤이나 명예와 같은 소위 문명적 개념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자식을 잃은 부모의 것이다. 오히려 몹시 동물적이기 때문에 더 순도 높다.

휴는 부싯돌로 불을 피우고, 생간을 먹고, 죽은 말의 내장을 덜어낸 후 그 안에 알몸으로 들어가 추위를 피한다. 휴의 여정은 수렵채집기 호모 사피엔스의 여정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광활한 대자연 속에서 인간을 살리는 것은 숫자나 지혜가 아니라 추억과 본능이다. 그 여정을 보자면 우리가 서바이벌이라는 수식을 갖다 붙인 현대 사회의 체제가 얼마나 호사롭고 사치스러운 엄살이었는지 알 수 있다. 진짜 생존이란 자연이 허락한 그 무엇 안에서 가능한 것이다.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 불을 사용하는 인간은 마치 세상을 모두 정복한 것 같지만 도구를 잃는 순간 인간은 매우 나약한 동물에 불과하다. 두 발로 걷기에 만성적 요통과 출산의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그런 동물 말이다.

지구의 관점에서 보자면, 인류는 가장 골치 아픈 생존자일지도 모른다. 유발 하라리의 말처럼 이처럼 수많은 생명을 멸절시킨 종은 호모 사피엔스 외엔 없었다. 수렵채집기가 끝났음에도 여전히 다디단 음식을 집어삼키기에 급급한


인류를 보자면, 어쩌면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덜 진화했는지도 모른다. 철학자들은 사람이 만들어낸 것을 아름답다고 말하며 대자연이 만들어낸 두렵고도 아름다운 광경을 숭고라 불렀다. 간혹, 어떤 훌륭한 영화들은 이처럼 숭고의 체험을 관객에게 전달해준다. 그 체험이란 다른 게 아니다. 바로 만물의 영장이 아니라 하나의 종에 불과한 동물로서의 인간, 나 스스로의 위치를 한 번쯤 거울에 비춰주는 체험, 그런 것 아닐까? 사피엔스에게 겸손을 가르쳐주는 영화 <레버넌트>이다.



강유정 | 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