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부끄러움을 배웁니다

“의지(意志)와 지성(知性)은 동일한 것이다.” 시인이 바라보는 칠판 위에는 이 한 문장이 쓰여 있다. 의지와 지성은 과연 동일한 것인가? 분명한 것은 때론 의지와 지성이 동일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탈리아의 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자신의 시대에 시선을 고정함으로써 빛이 아니라 어둠을 자각하는 자”, 그런 자를 일컬어 동시대인이라고 말한 바 있다. 아감벤에 따르자면, 동시대인이란, 시대의 어둠을 보고, 펜을 현재의 암흑에 담그며 써내려 갈 수 있는 자이다.

문학이란 어둠 속에서 아직 다가오지 않은 빛을 포착하는 행위이다. 시를 쓰고, 소설을 쓰고, 산문을 쓴다는 것은 곧 잠행 가운데서 미래를 기다리는 행동이기도 하다. 문학을 한다는 것은 동시대인이 되겠다는 선언이다. 그런 점에서, 시인 윤동주는 어둠의 일제강점기를 온몸으로 관통한 동시대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생애를 그린 영화 <동주>가 우리에게 부끄러움을 가르쳐 주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 속 <동주>는 내내 망설이고, 부끄러워하고, 처참해한다. 부끄러움의 차원은 다양하다. 우선, 친구이자 사촌인 몽규에 대해 느끼는 상대적 열등감과 부끄러움을 들 수 있다. 같은 곳에서 나고 자란 몽규는 언제나 반보씩 동주를 앞선다. 시를 사랑하고, 시인이 되고자 애썼던 동주였지만 몽규가 먼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다. 그런 몽규는 시대의 어둠 앞에 자신만의 목소리를 갖고 소리친다. 이 점이 또 동주를 부끄럽게 한다. 몽규는 시란 나약한 감성이라며 몰아치지만 동주는 시 안에 삶의 진실이 있다고 믿는다.

두 번째 부끄러움은 동주가 믿고 있는 시 안의 진실을 말하기에 세상이 점점 엄혹해졌다는 데서 비롯된다. 창씨개명, 징집명령과 같은 상황에서 하늘과 바람과 별을 노래한다는 것 자체가 어쩐지 부끄러운 일이 되고 만 것이다. 조선어로 쓰는 것이 불가능해진 시절, 이는 곧 조선어로 생각하는 것 자체를 검열하리라는 신호이기도 했다. 동주는 여태껏,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어떤 감정들이 모여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워즈워스의 신념을 믿었지만, 조선어를 잃을 위기에 처하자 그만 괴로움에 빠지고 만다.


영화 ‘동주’의 한 장면.


세 번째 부끄러움은 이 참혹한 시기에도 무엇인가를 사랑하고 있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세상은 사랑이나 낭만을 허락하지 않는데 시인은 자꾸만 그것을 바라고 꿈꾼다. 그런 세상이 아니라는 점에서 시인은 스스로를 부끄러워하고, 반성하고, 참회한다. 그는 순수하고 평화로운 세계에서 사랑하며 살아가고 싶지만 세계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동주는 철저히 자신의 시대와 불화했고 그렇기 때문에 철저한 동시대인이었다.

똑똑한 인간들은 자신의 시대를 증오하며 벗어나고자 했지만 동주는 자신이 이 시대에 속해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똑똑한 인간들이란 시류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몸을 얹었던 자들, 정지용이 윤동주의 첫 시집 서언에 적었던 “부일문사(附日文士)”, 영화 속 연희전문 교장 ‘윤치호’와 같은 자들일 것이다. 하지만 동주는 자신의 시대에 멀미를 겪으면서도 시대를 외면하거나 멀어지고자 하지 않았다. 거기서, 그의 부끄러움이 나타나고 그 부끄러움이 하나의 윤리이자 미학이 된다.

<동주>가 윤동주의 삶을 그리되 송몽규와 병렬적인 그림으로 제시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의미심장하다. 우리는 흔히 우정이란 무조건 같은 길을 가는, 동지애적 관계일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동주>에 묘사된 우정은 자신의 고유한 존재감 속에서 친구의 존재를 인정하는, 깊은 곳의 우정이다. 동주는 몽규에게 존중해야 할 심급의 이상이 되어주고, 몽규는 동주가 잊지 말아야 할 현실의 진리가 되어준다. 서로가 서로에게 부끄러움이 되어주는 이 관계는 어쩌면 우리가 잊고 있는, 공동체 속에서의 우정이 가져야 할 이상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동주의 시는 발표를 염두에 두지 않고 쓰였다. 그래서 그의 시는 마치 일기나 수기와도 같다. 이는 그만큼 그의 시에서 보이는 자기반성이 거짓 없는 고백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동주는 부끄러움이라는 포즈를 취한 것이 아니라 진정 스스로를 반성한 시인이다. 문제적인 것은 그가 살았던 시대가 부끄러워하는 영혼조차 억압했던 시절이라는 사실이다. 그가 검거되었던 1941년은 독립을 “꿈꾸는 것” 자체가 매우 반역적인 활동으로 간주되던 처참한 때였다. 생각과 염원조차 검열당할 때, 시인은 세상을 떠나고 부끄러움은 유실되고 만다.

동주의 삶에 비하자면 우리는 얼마나 뻔뻔한 하루를 살아가는 것일까? 그러므로 우리는 동주의 삶에서 부끄러움의 방식을 배워야 한다.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들은 오히려 큰소리를 치고 수치나 모멸의 공격적 언어로 사태를 무마한다. 무릇 훌륭한 문학은 우리에게 부끄러움을 가르쳐준다. 우리는 부끄러움 가운데서 스스로의 부조리를 바라볼 수 있다. 부끄러움을 통해 우리는 이 이기적인 “나”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고 또 한 “나”로 되돌아올 수 있다.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스스로를 부끄러움 속에서 발견해야 할 것이다. 부끄러움을 배워야 한다.



강유정 | 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