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종적 연민에 대하여

처음 본 이야기는 아니었다. “헝가리 의사 미클로스 니즐리는 아우슈비츠 특수부대의 극소수 생존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살아남은 그는 몇 가지 이야기를 전해줬다. 한 소녀의 이야기도 그 중 하나였다. “얽히고설킨 시체들의 몸을 풀어 호스의 물로 씻고는 화장터로 시체들을 운반한다. 그러나 맨 밑바닥에서 그들은 아직 살아있는 소녀를 발견한다.” 가스실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났지만 그녀는 무엇인가를 보았고, 또 기억할 수 있고, 따라서 발설할 수 있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다. 사람들은 무스펠트가, 가스실에서 살아남은 그녀의 목을 내리치는 장면을 그대로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건 그들의 미래이기도 했으니까.

니즐리의 경험담은 또 다른 생존자인 프리모 레비가 쓴 회고록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에 실려 있다. 그는 이 사태를 두고, “아주 예외적인, 전무후무한 경우였다”고 썼다. 프리모 레비는 생환 뒤 여러 편의 소설을 썼지만 이 회고담을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난 방식은 자살이었다. 프리모 레비의 글을 읽다보면, 왜 하필 자살이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적어도 자살이란 인간의 선택이라고 믿었다. “자살은 동물의 행위가 아니라 인간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포로생활 도중에 자살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그는 덧붙였다.

끔찍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통렬하게 스스로를 모멸하고, 악을 깊이 있게 들여다본 문장에는 밑줄도 그어 두었다. 그런데, 나는 그만, 이 이야기가 재현된 허구 앞에서 얕은 비명을 내지르며 울어 버리고 말았다. 라즐로 네메스 감독의 <사울의 아들>을 보고 말이다.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물 한 잔 마실 여유도 없이 어떤 건물에 들어가 옷을 벗고, 한꺼번에 샤워실에 들여보내진다. 샤워를 마치면 따뜻한 차를 줄 테니, 식기 전에 얼른 씻고 나오라며, 독일군이 이야기한다. 옷걸이의 번호를 기억하라고 일러주기도 한다. 하지만, 잠시 후 이 모든 게 ‘잔인한 농담’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들은 가스를 마신 채 시신이 되어 돌아온다. 그런데, 이 시신들 가운데 기침을 하는, 즉 아직 살아있는 소년이 발견된다. 존더코만도(sonderkommando)라고 불리는 시체 처리반은 깜짝 놀라 의사를 부른다. 다급히 온 의사는 청진을 하더니 손수 숨을 멎게 하고, 부검을 명한다.

그런데, 한 존더코만도가 시신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부검의에게 직접 시신을 전하겠다고 나서니, 누군가 그에게 묻는다. “아는 사람인가?” 포털사이트에 <사울의 아들>은 “시체 처리반으로 일하던 남자 앞에 오늘, 아들의 주검이 도착했다”라는 한 줄로 요약되어 있다. 요약되어 있던 그 장면이 바로 이 순간이었다.


영화 <사울의 아들>의 한 장면.


영화는 멍한 표정의 남자를 사울이라고 소개한다. 우연처럼, 터무니없을 만큼 담담한 태도로 말이다. 사울이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가 안고 온 사체는 그의 아들이다. 순간 사체는 ‘토막’이 아니라, 사울의 아들이 된다. 순간 책에서 읽었던 소녀 역시 “그” 소녀가 되어 무겁게 다가온다. 소년과 소녀가 토막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인간’임을 절감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쉽게 어떤 사태에 대해 이해했다고 믿는다. 가령, 살아났지만 끝내 살해당한 소녀를 보며 그 고통이 어떠했을지 이해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울의 아들>은 그 이해라는 것이 얼마나 위선적인 단순화인지를 보여준다. 내 아들이 내 눈앞에서 죽었다면 그리고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그 아이가 다시 죽임을 당하는데 아무 저항도 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이해를 넘어선 다른 문제가 된다. 영화는 그렇게 우리가 말하는 이해의 위선을 구체적 장면으로 일깨워준다. 인간이란 그렇게 쉽게 이해되는 절망이나 폭력의 주체가 아니다.

영화의 힘은 여기서 확인된다. 기록에 남은 실제 소녀의 죽음보다 거기서 비롯된 허구적인 소년의 죽음이 더욱 절절히 와 닿는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자동화되고 습관화된 이해의 세계에 살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이해도 일상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일상을 낯설게 하는 것, 그게 바로 허구의 힘이다. 우리는 그렇게 실재하지 않았던 사울이라는 사람을 통해, 불행의 깊이를 질문하고 연민을 경험하게 된다. 이 종적 동일성이야말로 연민의 기반이다. 그 어떤 사자도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사슴을 잡는 데 연민을 느끼지 않는다. 연민은 같은 종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고통의 교감이다. 인간이 인간에게 느끼는 것이 바로 연민인 것이다.

루소는 이 종적 차이를 다른 곳에서 발견했다. 왕들이 백성에게 동정심을 갖지 않는 것은, 그들이 결코 인간임을 믿지 않기 때문이며, 귀족이 평민을 멸시하는 것은 그들이 결코 평민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에밀>에 쓰인 이 구절은 곧, 인간에게 있어서 연민이 어디서부터 기원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바꿔 말하면, 위선적으로 이해한다고 말하지만, 부자는 결코 자신이 가난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빈자를 연민하지 않고, 정치가는 일반 시민이 될 턱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에 권위적이다.

우리는 모두 같은 종으로서, 인간으로서 계급이나 지위, 부의 여부를 차별적 특권으로 여기지 않을 때 서로를 연민할 수 있다. 인간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연민의 기반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말해, 타인의 고통에 무감한 것은 타인을 같은 인간으로 여기지 않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연민이 없는 자는 무자비하고 냉정한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를 다른 ‘종’으로 여기는 배타적 사태이다.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인 프리모 레비가 “이것이 인간인가”라고 물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것은 같은 종으로서 인간의 형편에 연민을 느끼기 때문이다. 만일 타인의 고통에 무감하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그 타인과 같은 ‘인간’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이해한다고 여겼던 삶의 사태들을 역동적인 고통으로 되살려 내는 것, 한 인간의 눈을 통해 재구성된 삶이 주는 힘, 그게 바로 허구의 힘이다. 나 자신이 아직 인간인가를 확인하고 싶다면 자신 외에 무엇을 연민하는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연민함으로써 인간은 인간일 수 있다.



강유정 | 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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