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연애도 사치라 하오

청춘영화라고 부를 만한 장르가 있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사이의 젊은이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또래가 겪을 만한 고민을 경험한다. 불안정한 미래, 사랑, 연애, 가족과 같은 문제로 고민하면서 우리가 흔히 자아정체성이라고 말하는 것을 온몸으로 앓는 것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청춘영화라면, <바보들의 행진>이나 <고래사냥>처럼 대학생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과 한동안 시리즈로 제작되었던 고교생 얄개 이야기를 들 수 있겠다.

청춘은 매우 동시대적인 개념이다. 청춘영화들만 쭉 늘어놓고 보더라도, 청춘의 의미와 고민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눈에 들어온다. 가령, 1970년대 대학생 이야기인 <바보들의 행진>에서 대학생 병태는 가위를 들고 서 있는 군인을 피해 도망가고, 여자친구 영자는 미니스커트 단속반을 피해 다닌다. 연애를 하는 병태의 가장 큰 고민 중 하나는 바로 키스, 더 깊은 육체관계는 청춘영화의 이미지에 맞지 않는 듯 거의 다뤄지지 않았다.

일본 근대문학의 효시로 일컬어지는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마음>에도 20대 초반, 대학을 다니는 젊은이가 등장한다. 그는 거의 무성애자처럼 여자 문제에는 관심이 없다. 그가 존경하는 ‘선생님’은 결혼한 유부남이지만 그 역시 무성애자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선생님은 심지어, 친구와 한 여자를 두고 마음의 경쟁을 한 것에 죄책감을 갖고 현재를 부채로 짊어지고 살아간다. 21세기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건 짝사랑이라고 하기에도 어려운 것이지만 선생님은 그렇게 이성에 대한 관심을 염결히 처리한다.


영화 <스물>의 한 장면.

우리 세대의 청춘들은 잉여로 불린다. 심지어 하나둘씩 포기하는 게 부족해, 셀 손가락이 부족하다는 의미로 N포세대로 불리기까지 한다. 이 포기한 것 중 하나에 연애가 있다. 연애를 포기하다 보니, 결혼 역시 더불어 포기될 수밖에 없다. 최근 들어 관객에게 주목을 받은 청춘영화들은 이렇듯 잉여가 되어 버린 청춘의 자화상을 그린 작품들이 많다. 그런데, 이런 맥락 가운데서 청춘의 발랄함을 보여주었기에 역설적 관심을 받은 작품이 있다. 바로 이병헌 감독의 <스물>이었다.

<스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경제난이나 전망 부재와 같은 어려움을 겪기는 하지만 이는 주변적 고민에 불과하다. <스물>의 주인공들이 겪는 가장 격심한 갈등은 바로 성, 섹스이다. 아름다운 여자 선배를 보고 마구 성적 흥분을 느끼는 대학 신입생, 어떻게든 여자를 유혹해 성적으로 정복하고자 하는 바람둥이 등으로 구성된 스무 살 청춘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바로 성이다. <스물>은 혈기 왕성한 스무 살 남자아이들이 여자의 육체에 관심을 갖는 것은 무척이나 당연한 일이라는 관점에서 코믹한 이야기들을 전개해 나간다.

이러한 관점은 영화 <위대한 소원>에서도 발견된다. <위대한 소원>은 루게릭병에 걸려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친구의 마지막 소원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이다. 불치병, 요절, 마지막과 같은 단어들이 주는 슬픔과 달리 영화는 시종일관 발랄하고 웃기다. 그 이유는 죽음을 앞둔 친구의 소원 때문이다. 고환(류덕환)은 죽기 전에 어른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어른은 섹스를 하고 싶다는 것의 완곡한 표현이다.

세상에, 죽기 전에 섹스를 하고 싶다니, 어이가 없지만 주인공이 스무 살도 되지 않은 고교생임을 생각해 보면 또 그렇게 이해되지 않을 것도 없다. 그런데,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불치병, 이른 죽음과 성의 결합은 사실 새로운 것은 아니다. 수많은 청춘영화와 멜로드라마 속에서 어린 연인들은 상대의 때 이른 죽음으로 인해 괴로워하고 슬퍼했다. 곽재용 감독의 <클래식>이나 <비오는 날의 수채화>만 봐도 그렇다.

문제는 21세기의 청춘이 원하는 게 ‘사랑’이 아니라 단순히 성적 행위라는 것이다. 영화 속 주인공 고환은 죽기 전에 단 한 번이라도 사랑해보고 싶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단 일회라도 좋으니 여자와 관계를 갖고 싶어 한다. 사실, 이 관계는 말 그대로 일회적인 것이다. 추억이라기보다는 경험이며 상대와의 교류가 아니라 체험일 뿐이다.

이러한 맥락은 영화 <스물>에서도 감지되었던 것이다. 사랑이 인간의 욕망이라면 섹스는 욕구에 속한다. 즉, 사랑이라는 게 인간의 마음과 심리가 복잡하게 연루되는 심오한 정신 작용의 일부라면 섹스는 밥 먹고, 잠자는 것처럼 결핍이 되면 채우고 싶고, 채우고 나면 당분간 떠오르지 않는 생물학적 욕구의 일부인 셈이다. 사랑이 지속적인 관계 속에서 발생한다면 성은 일회적 교환일 수도 있다. 성적 교류는 사랑보다 덜 집중해도 되고, 마음을 적게 투자해도 된다. 섹스에는 시간과 자아를 꼭 투자할 필요가 없다. 그만큼 상처도 없다.

<스물>과 <위대한 소원>을 보자면 청춘의 소망이 성에서 섹스로 축소된 현실이 보이는 듯하다. 정서의 교환으로서의 사랑은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한다. 사랑을 하기엔, 현실이 너무 팍팍하다. 성은 욕구의 문제이니 쉽게 포기하기도 어렵고 또 그만큼 대단한 집중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섹스를 욕구에서 욕망으로 변화시킨 거의 유일한 종이기도 하다. 사랑은 인간의 권리이자 고유한 능력인 셈이다.

섹스에 매진하는 최근의 청춘영화들은 감정의 교류로서의 사랑을 사치로 여기는 청춘의 가슴 아픈 자화상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고래사냥> 식의 반항이나 <젊은 날의 초상>에서 보여주었던 방황을 오히려 부러워해야 하는 지금, 방황도 반항도 사치일 수밖에 없는 우리 세대 청춘이 정말 팍팍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경제적인 요구는 사람을 노예나 동물과 같은 수준에 놓을 수도 있는 것이다.



강유정 |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