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권위의 탄력

즘 한창 화제는 ‘해외’다. 칸영화제와 맨부커상으로 5월 내내 언론이 뜨겁다는 이야기다.

침체기에 돌입한 것으로 보였던 한국영화에 활기를 준 것도 바로 칸이다. <박쥐> 이후 오랜만에 경쟁 부문에 초청받은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를 비롯해, <곡성> 등의 비경쟁 부문 초청작도 여러 편이다. 주목할 만한 시선에 <무뢰한>과 <마돈나> 두 편이 초대받았던, 작년에 비해 훨씬 더 풍성한 결과이다.

해외 영화제 초청 및 수상이 뭐 그렇게 큰일일까 싶지만 사실상 거의 뉴스가치에서 제외되었던 한국 영화에 활기를 준다는 점은 주목해야만 한다. 한동안 뉴스에서 주목하는 한국영화는 주로 숫자로 환산되는 경제적 가치 즉 천만관객을 돌파한 영화들에 한정되었다. 20여년 전처럼 개봉 영화를 뉴스에서 소개한다거나 영화 속에서 발견되는 사회적 현상을 읽고 짚어내는 기사들은 이제 찾기 힘들다. 영화의 교양적 가치는 줄어들고 산업적, 상업적 가치만 부각되는 것이다.


영화 <곡성>의 한 장면.



그런 점에서, 해외 영화제 초청 소식은 영화의 교양적, 예술적 가치에 관심을 갖게 하는 매우 예외적인 자극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그 영화제가 권위 있는 행사일 땐 더욱 그렇다. 칸영화제를 구체적으로는 모르지만 세계 3대 영화제라는 것쯤은 모두 알고 있다.

칸영화제는 전통적으로 실험적이며 도전적인 영화들을 주목하고 선호해왔다. 영화의 예술적이며 교양적 가치에 꾸준한 관심을 기울이고 또 유지하는 영화제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초청은 한국 영화가 가진 교양적, 예술적 가치에 대한 관심과 인정이기도 하다.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나 나홍진 감독의 <곡성>은 상업적 가치만을 두고 말하기엔 어려운 작품이다. 이미 개봉한 <곡성>만 해도 그렇다. <곡성> 개봉 후에 무척 흥미로운 현상이 있는데, 이 영화에 대한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린다는 점이다. 별 다섯 개 만점에 다섯 개 모두를 주는 평론가나 관객이 있는 한편 불쾌하고 답답하다며 별 한 개도 아깝다는 사람도 있다.

<곡성>에 대한 진지한 평론을 읽어보면 더 흥미롭다. 어쩌면 이렇게들 다른지, 거의 같은 해석을 하는 전문가가 없다. 어떤 사람은 피해자의 심리를 읽고, 어떤 사람은 한국 사회의 구조를 읽고, 어떤 사람은 인간의 믿음과 종교를 말한다. 더 흥미로운 것은 각자 나름대로 그 논리와 재미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각자 자신에게 보이는 것만 주목하고 그것을 설득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여 주장한다. 보이는 게 다 다르다 보니 <곡성>은 무성생식을 거듭하는 유기체처럼 해석에 따라 완전히 다른 작품으로 확장되고 증식한다.

중요한 것은 이 자체가 매우 오랜만에 만나는 영화장의 활기라는 사실이다. 서로 다른 해석, 서로 다른 평가가 평론가나 전문가의 작은 마을에서 피고 지고 사라지며 정체되는 게 아니라 관객과 관객 사이의 설전으로 살아 움직이기 때문이다. 거의 정답처럼 읽히는 하나의 답이 아니라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읽어도 되는 작품의 탄력성도 반갑다. 영화의 어떤 빈 구멍은 관객이 스스로 채워야만 하는데, <곡성>의 빈 구멍엔 다양한 의견과 평가가 삽입되어 탱탱한 탄력으로 점점 부풀어 간다.

이러한 탄력의 회복은 한강의 맨부커상 수상에도 기대해볼 만하다. 소설 <채식주의자>가 맨부커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하자 포털 사이트 상위 검색어로 단숨에 한강이 올라왔다. 문학을 전공한 사람의 입장에서야 한강이 낯익은 이름이지만 수상 결과 소식에 달린 댓글들을 보자면, 한국 독자에게 한강은 꽤나 낯선 작가였던 듯싶다.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3대 문학상 중 하나라는 평가와 함께 한강을 몰랐던 독자들은 이제라도 한강을 만나보겠다며 부지런을 떤다. 한편, 노벨상도 아닌데 지나치게 수선스럽다는 반응도 있고 그래봤자 한국문학은 재미없다는 딴죽도 있다.

하지만 이런 소란 자체가 무척이나 반갑다. 말 그대로 너무 조용한 동네로 밀려나 서사의 외지, 게토가 돼가던 문학계에 오랜만에 떠들썩한 뉴스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조용히 문학을 바라보던 독자들이 하나둘씩 한강의 소설을 읽어 볼 테고, 각자의 의견과 평가를 보탤 것이다. 모든 독자들이 읽고,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좋다, 대단하다, 세계적이다라고 평가할 필요는 없다. 다만 많은 독자들이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고 자기만의 의견을 가질 필요는 충분하다. 그리고 이 다양한 의견들로 문학은 다시 그 팽팽한 탄력성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권위라면 무조건 나쁘고 억압적인 게 떠오르지만 권위는 침체된 바닥을 휘젓는 강인한 구심력이기도 하다. 5월에 들려온 오래된 권위, 칸과 맨부커상의 권위도 이렇듯 강렬한 구심력을 갖는 힘일 것이다. 권위란 그 이름을 빌려 누리려는 사람에게는 억압이지만 때로는 많은 이에게 하나의 믿을 만한 궤도를 제공하는 신뢰이기도 하다. 믿을 수 있는 권위는 아주 오래된 새로움이기 때문이다.



강유정 ㅣ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