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불편한 ‘아가씨’는 누구의 아가씨인가

※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에게 방해가 될 만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가 널 얼마나 원하는지에 대한 말들로 가득해…봐.”

사라 워터스의 소설 <핑거스미스>는 모드의 고백으로 끝난다. 모드는 소위 귀부인을 위한 야설을 쓰는데, “너 같은 여자 아이가, 어떻게 이런 소설을 써?”라고 하녀 수전이 묻자 아가씨 모드는 대답한다. “난 숙녀가 아니야.” 그리고 이 책들은 “내가 널 얼마나 원하는지에 대한 말들로 가득해…봐”라고 말이다. 그러니까 사라 워터스의 소설 <핑거스미스>는 남성의 청각과 시각, 상상력을 위해 쓰였던 ‘야설’을 읽어주던 숙녀, 다른 말로 하자면, 남성이 원하던 여성 낭독자였던 아가씨가 자신의 욕망을 써내는 작가로 변신한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숙녀였던 모드는 남성의 욕망을 채워주는 풍경의 일부였지만, 작가 모드는 자신의 욕망을 글로 써내 펼치는 주인이 된다. 아가씨는 이제 사랑의 주체, 여성이 된 것이다.
영화 &lt;아가씨&gt;의 한 장면.

영화 <아가씨>의 한 장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핑거스미스>에서 숙녀 시절의 모드는 이런 말을 한다. 삼촌은 독약도서관의 관장인데, 그래서 모드가 열두 살일 때부터 예방약을 한두 방울씩 주었다고 말이다. 그래서 모드는 삼촌이 ‘판매’하는 야한 소설과 그림에 대해 아무런 감응이 없다. 이미 면역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시체처럼 손발이 차갑다. 문학비평가 라이오넬 트릴링은 문학의 기능 중 하나가 바로 이 면역 기능이라고 말한 바 있다. 미트리다테스적 기능이라고 부르는 이것은 문학이 세상에서 겪게 될 악에 대한 면역력을 키워준다는 믿음을 반영한다. 세상은 아름답고 따뜻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기와 배신, 살인과 협잡이 일어날 수도 있는 곳이라는 것을 문학이 미리 체험시키고 대비시킨다는 것이다.

<핑거스미스>의 면역 이론은 트릴링의 미트리다테스적 기능에 대한 재치있는 패러디라고 볼 수 있다. 어떤 한 부분에 대해 지나치게 노출되는 것은 오히려 과도한 면역반응을 일으키는 것이다. 모드에게 남녀 간의 사랑이나 욕망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 그녀의 차가운 손과 발에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어준 사람, 그러니까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받아 마땅한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해 준 사람, 그 사람이 바로 하녀 ‘수전’이다. 하녀는 욕망을 차압당했던 아가씨에게 욕망을 돌려준다. 사랑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핑거스미스>가 훌륭한 여성문학으로 평가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적어도 이 작품 <핑거스미스>를 원작으로 박찬욱이 <아가씨>를 만든다고 했을 때, 경계와 질서를 넘어서는 아름답고 우아한 이야기로 변주되지 않을까 기대했다. <올드보이>의 박찬욱은 호명의 질서를 훌쩍 넘어섰고, <박쥐>의 박찬욱은 인간과 괴물의 경계를 날아올랐으니까 말이다. 올해 칸에서 들려오던 ‘남성중심적 시각(male gaze)’이라는 비평에 대해서도 의구심이 먼저 일었다. 설마 박찬욱의 영화에서 남성중심적 시각을 보게 될까라고 말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영화 <아가씨>는 우려를 벗어나지 못했다. 남성중심적 시각이 무엇인지를 영화의 의식과 무의식 차원에서 고스란히 보여주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펼쳐지는 정사장면은 언젠가 극 속에서 아가씨 히데코(김민희)가 신사를 가장한 변태성욕자들에게 읽어주었던 동성애 장면의 실연이다.

영화 속에서 남성들은 들었던 야한 이야기를 그림, 즉 눈으로 확인할 수 없게 되자 급격히 흥미를 회수하는데, 이에 히데코는 구체관절인형을 이용해 그들의 시각적 욕망을 채워준다. 그제야 그들은 만족한다. 듣는 데서 만족할 수 없어 보고야 마는 변태성욕자들, 남성의 욕망이 그렇게 묘사된 것이다. 그런데 <아가씨>는 히데코가 영화에서 읽어 내렸던, 희한한 동성애 장면을 급기야 시각적으로 재현해 준다. 말로 설명되고, 히데코가 읽었던 그리고 가히 기묘해서 사랑이라기보다는 묘기처럼 여겨졌던 바로 그 장면을 시각적으로 상연한 것이다.

과연 이 재구성은 누구의 시선을 위한 것일까? 아니 누구의 만족을 위한 것일까? 좀 더 엄밀히 말해, 박찬욱 감독이 보는 관객의 시선은 어떤 것일까? 겉으로야 두 여인의 성적 향유(jouissance)이지만 이 장면은 분명 시각을 위한 외설적 장면임을 부인할 수가 없다. 오히려 영화에서 가장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을 부분, 즉 욕망이 응집된 장면은 이모부 고우즈키(조진웅)가 백작(하정우)을 고문하던 장면이다. 마치 <올드보이>에서 니퍼로 이빨을 하나하나 뽑듯이, 고우즈키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잘라낸다.

<핑거스미스>(fingersmith)라는 원작의 제목을 생각해보자면, 절묘하게도 아이러니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성기는 지킬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백작의 독백은 또 어떠한가?

말하자면 <아가씨>는 사라 워터스가 탈출시켰던 시선의 감옥과 욕망의 성 안에 다시 두 여성을 데려다 감금시킨 작품에 가깝다. 비록 박찬욱 감독의 서사 속에서 그들은 배를 타는 데 성공했지만 원작에서 그녀들이 스스로 작가가 되어 경제적 주체가 되었던 것에 비해, <아가씨>의 그들은 훔친 돈을 차지하는 데서 멈춘다. 박찬욱 감독은 어느 인터뷰에서 원작에 없는 결말로 두 여성인물을 관통하는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카타르시스는 관객이 느끼는 몫이다. 미리 짐작하는 자가 분명 고수이긴 하나 카타르시스를 오해한 것은 아닐까 싶다. 때론 복잡한 가면이 왜곡된 내면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고백이 될 때도 있다. 기대했던 <아가씨>가 불편한 <아가씨>가 된 까닭이다.



강유정 ㅣ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