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그 시절, 우리가 모르는, 소녀

나도 한때 소녀였다. 아름다웠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상투어가 아니라 여물지 않은 상처와 혼돈으로 힘들었던 때가 있었다는, 고백이다.

영화 <우리들>의 한 장면


소녀라는 이름이 들어간 대중가요, 드라마, 영화들은 대개 그 아름다움을 칭송한다. 혁오가 리메이크한 이문세의 노래 속 소녀도, 대만의 청춘물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소녀>의 소녀도 그렇다.

이런 가사와 제목 속 소녀들은 하얀색 블라우스에 생머리를 곱게 빗은 소녀일 것만 같다. 친구들과 속닥속닥 귓속말을 나누고, 하얗고 맑은 무릎 위에 고운 시집을 올려놓은 채 까르르 햇살이 부서지듯 웃는, 그런 소녀 말이다.

하지만 소녀시절만큼 힘든 시기가 또 있을까? 우리는 어린 시절의 삶을 삶 그 자체가 아니라 일종의 모의 학습이나 훈련으로 취급하곤 한다. 유년기 혹은 아동기 등으로 나뉘는 성장발달과정으로 접근할 때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내가 열두 살일 때, 그때 난 삶을 학습하는 게 아니라 이미 살고 있었다. 누구나 그랬을 것이다. 그때 만약 아프고 힘들었다면 삶의 고통을 연습한 게 아니라 그 자체로 고통이었음이 분명하다. 열두 살의 고통보다 서른두 살의 고통이 더 크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그건 아마 단기 기억상실에 빠진 어른이거나 자신의 고통만 제일 크다고 말하는 이기주의자들일 터다. 열두 살에는 열두 살 나름의 고통과 고민, 상처가 있는 것이다.

윤가은 감독의 장편 데뷔작 <우리들>은 잊을 수 없는, 열한 살들의 고통을 보여준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고통스러워하는 아이들이 열한 살의 소녀라는 점이다. 소년들은 대부분 서로에게 주먹을 날려 상처를 입힌다. <우리들>의 여섯 살 아이 윤(강민준)도 친구와 자꾸 싸우느라 늘 얼굴 어딘가에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인다. 눈에 보이는 상처와 고통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소녀들은 좀 다르다. 소녀들은 겉으로는 흉터가 보이지 않는, 말과 눈빛으로 상대에게 잊을 수 없는 아픔을 심어준다. 오정희의 소설 <동경>에 등장하는 구절인, “칼빛처럼 독한 기억”이란 이렇듯 말로 새겨진 상처가 아닐까? 말과 관계가 남긴 상처는 어떤 말과 기억을 이식해도 완벽히 지워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서로에게 상처를 남기는 친구란 사실 가장 친한 친구일 확률이 높다는 사실이다. 엄마나 아버지가 우리 아이의 가장 친한 친구로 여기고 있는 바로 그 친구가 가장 잊기 힘든 상처를 주는 일이 더 많다는 것이다.

<아이들의 숨겨진 삶>이라는 책에서 마이클 톰프슨은 모든 아이들이 관계에 대한 욕망에 시달린다고 말한 바 있다.

관계에 대한 욕망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친구들, 또래집단에게 괜찮은 녀석, 멋진 친구, 그럴듯하고 믿음직한 사람이라는 신뢰를 얻는 것일 게다. 이 욕망은 어른들에게 괜찮은 사람으로 인정받으려는 욕구보다도 훨씬 강렬하다. 엄마, 아빠의 인정을 위해 애교를 총동원하던 아이가 또래아이와 비슷해지기 위해 낯설게 굴었던 경험은 누구에게나 한 번씩 있을 터다.

영화 <우리들>은 그런 점에서 어른의 언어와 시각으로 아이들을 분석하려는 욕심이 아니라 아이들의 언어와 시각에서 그 세계를 보여주려는 소망을 가진 작품이다. 여름방학 동안 두 아이는 그저 서로만 바라보며 우정을 쌓아 간다. 처음 두 여자아이는 서로가 가진 것 혹은 갖지 않은 것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굳이 따지자면 선(최수인)은 형편이 넉넉지 않고 지아(설혜인)는 부모님이 이혼을 하고 아버지가 재혼을 했다. 방학 동안은 그러니까 학교에 가지 않는 동안엔 서로의 결핍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방학은 짧다. 여름, 과실이 익어가고 싱그러운 푸른빛이 여물었던 여름이 지나면서 아이들은 여러 형용사 아래 놓이게 된다. 두 아이는 다른 아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전학온 부잣집, 공부 잘하는 아이 혹은 부모님의 따뜻한 사랑을 받고 자랐지만 휴대폰도 없는 가난한 아이 등으로 나뉜다. 선물로 주었던 비싼 색연필은 가난한 아이에겐 어울리지 않는 학용품이 되고, 돈을 주고 산 매니큐어 색에 비해 봉숭아물은 촌스럽기 그지없다. 아니, 다른 친구들이 촌스럽다고 말하고, 궁색하다고 속닥거리니 그건 지워야 하는 것이 되고, 그런 친구는 멀리하는 게 옳아 보인다.

<소녀들의 심리학>을 쓴 레이첼 시먼스의 말처럼 그렇다고 이렇게 속닥거리는 여자아이들이 악당은 아니다. 그것은 다만 소녀들이 경유하는 멀미 나는 성장의 일부일 뿐이다. 모든 여자아이들은 자라면서 가해자, 방관자, 피해자의 역할 전부를 한 번쯤은 경험한다. 각각의 가슴속에 아픈 기억 하나쯤은 다 갖고 있는 셈이다. 결국 소녀들, 아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혼자 남는 것이다. 아이들은 단지 친구가 단 하나만 있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떤 희생을 치르고라도 갖고 싶은 것은 완벽한 소녀의 모델이 아니라 단 한 명의 소중한 친구이다.

누구나 다 아동기를 지나지만 아동을 이해할 수 없듯이 소녀시절을 지났다고 해서 소녀를 이해할 수는 없다. 모른다는 것은 부끄러운 게 아니라 고백해야 할 문제이다. 우리는 아이들을, 소녀를 그리고 여자를 잘 모른다. 윤가은 감독의 <우리들>을 보며 다시금 알게 된 것도 바로 이 점이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히 알 듯싶다. 모든 아이들은 다 제 나름의 고통을 안고 커나가고 있다는 점 말이다. 힘겹게 성장하는 모든 아이들에게 격려를 보낸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