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아직 발견되지 않은 단어, 노년

그전까지는 돈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에 돈을 경멸했어요. 우리 집에서는 돈에 대해서 논하는 것은 금지였죠. 돈은 부끄러운 것이었으니까요. 우리는 돈이 부재한 나라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었어요.”

 

2015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스베틀라나 알렉시에비치의 소설 <세컨드 핸드 타임: 호모 소비에티쿠스의 최후>에 실려 있는 이야기 중 하나이다. 소비에트연합, 그러니까 소련이 패망하자 사람들은 자유보다 먼저 을 만났다. 돈이야 그전에도 없었겠냐만, 돈이라는 것의 가치 그리고 돈이라는 것의 상징성이 자유보다 먼저 감각을 급습한 것이다.

 

노인들의 삶과 인간관계를 그린 tvN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의 한 장면.

 

눈길을 끄는 것은 그 다음이다. 사람들은 돈을 알고부터 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책은 인생을 대신하는 것이었기에, 돈이 없던 시절, 책은 상상으로 자유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을 경험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창구였다. 상상력에는 약간의 결핍이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호모 소비에티쿠스는 이렇게 말한다. “소련 시절에 말은 성스럽고 신비스러운 것이었다라고 말이다.

 

말이라는 게 참 신기하다. 세상에 어떤 개념이나 일이 있고 말이 생겨났겠지만 때로는 어떤 말이 사상이나 개념, 일들을 만들어 내기도 하니 말이다. 문제는 세상이 너무도 빠르게 바뀌어 가다 보니 말이 생성되는 속도가 사건의 속도를 따라잡기가 힘들다. 그러니 재현의 영역에 속하는 소설이나 영화의 언어는 어떨까? 소설과 영화를 본다고 해서 바로 돈이 생기지도 직장이 나타나지도 그렇다고 연인이 등장하지도 않는다. 부지런히 방법론을 찾자면 이런 재현의 예술들이 줄 수 있는 답이라는 건 실용적이지 않은 것들뿐일 테다. 빠른 답을 원하는 세상에서 문학이나 영화가 주는 답이라는 건 참으로 은유적이고 우회적이다.

 

최근 들어 가장 자주 접하는 현실의 문제 중 하나가 바로 노인들의 삶이다. 한국사회가 워낙 빠르게 고령화되어 가다 보니, 인구를 대비해서 노인들의 숫자가 대폭 늘어났다. 그런데 가만 보면 우리의 삶은 나이 들어가는 것에 대해 아직 적정한 언어들을 준비해 두고 있지 못하는 듯싶다. 실버라는 용어만 해도 그렇다. 머리가 희끗희끗 물들어 가는 50대 이상을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어느새 노인을 우회적으로 일컫는 표현이 되었다. 이젠 실버라는 말을 듣는다고 해서 노인들의 이미지가 특별히 달라 보이지 않는다. 낡은 표현이 되고 만 것이다.

 

영화나 소설의 경우를 보자면 더욱 제한적이다. 한국 소설 중에는 몇몇 노년의 삶을 주제로 삼거나 노인이 등장하는 작품들이 있다. 물론 <국제시장>이나 <장수상회>와 같은 영화들도 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작품들 속에서 다뤄지는 노년이라는 게 말하자면 최신으로 업데이트된 언어들로 구성되어 있다기보다 조금은 막연하고 진부한 이미지들의 중복인 경우가 많다. 최근 케이블 채널에서 방송되고 있는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가 새롭게 보이는 맥락도 여기에 있다.

 

<디어 마이 프렌즈>에는 노년기의 삶으로 접어들어가는 여러 명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자식들을 다 키워 두고 환갑 정도 먹은 여성부터 거의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어 치매를 앓고 있는 자까지 다양하다. 눈길을 끄는 것은 이 드라마가 그 삶을 다루는 방식이다.

 

<디어 마이 프렌즈>작가라는 직업을 가진 인물을 통해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기억하고, 기억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 나이가 든 그들에게 그들의 언어 그리고 화자로서의 지위를 부여한 것이다. 젊은 주인공이 자신의 삶을 기록하기 위해 주변의 삶을 끌어들이는 게 아니라 그들의 삶을 전달하기 위해 자신의 필력을 빌려준다. , 노년에 언어와 말을 선사한 것이다.

 

사람은 워낙 이기적인 동물인지라, 어떤 점에서 아직 나에겐 노년의 언어가 젊은 주인공 ’(고현정)의 언어만큼이나 와 닿지는 않는다. 아직 살아보지 못한 시간에 대한 추리력은 생각보다 허약하고 무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을 통해 전달되는 그녀들의 언어를 보자면, 그 하나하나의 삶 속에 하나하나 다른 사연이 있고 그럼으로 인해 각기 다른 서사의 주인공이라는 것쯤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적어도, <디어 마이 프렌즈> 속의 인물들은 개성을 지닌 하나의 사람이지 노인이라 부르는 보통명사의 일부가 아니다. 무엇인가를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 순간, 그들은 단순한 사회 구성원이 아니라 하나의 인물이 된다. <디어 마이 프렌즈> 속 인물들은 무엇인가 좋아하고, 싫어하고, 두려워하고, 기뻐하는 그런 인물들로 그려져 있다.

 

언어를 갖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노년의 삶에 언어가 주어진다면 그것은 노년이라는 하나의 추상어가 아니라 각기 노인들이 가진 제각각의 삶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무엇이든 추상적 형상화 속에는 진실이 자리 잡기 힘들다. 어린이를 사랑하자는 말이 사회적 관심의 사각지대에 놓인 한 아이를 구할 수 없는 것처럼, 관심은 그렇게 구체적인 언어로부터 시작된다. 언어를 고민한다는 것이 세상을 사랑하는 일이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