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최소 인간 실격에 대하여

불행한 자들에게 연민의 정을, 행복한 자들에게는 관용을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의 마지막 장, ‘마지막 어둠, 마지막 새벽의 첫 구절이다. 이런 문장도 있다. “운수 좋은 이들이 자행하는, 불운한 이들에 대한 착취.” 빅토르 위고의 다른 소설 <웃는 남자>의 한 구절이다. 이 두 문장은 어쩌면 하나의 짝일지도 모르겠다. 행복한 자들은 불행한 자들에게 연민을 느껴야 하지만 오히려 불운한 이들을 착취한다.

 

영화 <레 미제라블>의 한 장면.

 

빅토르 위고는 우리가 누리고 살아가는 행복이 운수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은수저를 물고 태어나는 것은 그저 운수 덕택이지 그 사람이 누려야 마땅한 본질적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가난하고, 몸이 불편한 것은 도덕이 아니라 운수의 문제이다. 그러니 운수가 좋은 사람들은 운수가 나쁜 사람들을 연민해야 한다. 그건 최소 인간의 조건이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운수가 좋은 사람들이 불운한 이들을 오히려 착취한다. 연민하지 않고, 관용을 베풀지도 않는다. 영화로 더 잘 알려진 <레 미제라블>의 주제는 사실 연민과 관용에 있다. 이웃에 대한 연민이야말로 혁명의 시작이다. 빅토르 위고가 말하는 혁명은 이웃의 발견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흔히 <레 미제라블>의 제목이 의미하는 비참한 사람을 장발장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장발장은 가장 비참한 사람은 아니다. 자베르에게 쫓기고 평생 불안과 공포 속에 살아가긴 하지만 적어도 그에게는 따뜻한 먹을거리와 안락한 집, 안정적인 직장이 허락되었다. 무엇보다 자신을 관용해준 미리엘 주교와 같은 사람을 만났다. 고집불통 원칙주의자인 자베르만 만난 게 아니라 은촛대를 훔친 걸 눈감아주는, 그런 관용과 연민을 가진 사람도 만난 것이다. 덕분에 그는 가장 비참한 사람이 될 불행에서 비켜났다.

 

그렇다면 가장 비참한 사람은 누구일까? 그건 아마 코제트의 어머니 팡틴이었을 터이다. 팡틴이 지키고 싶었던 것은 단 하나, 딸아이 코제트이다. 그러나, 무자비한 세상은 어머니의 그 작은 모성을 짓밟는다. 장발장은 팡틴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음을 후회하지만 너무 늦고 만다. 그래서 장발장은 속죄의 의미로 팡틴의 딸 코제트를 불한당들로부터 구해내고 그녀를 아름다운 숙녀로 키워낸다.

 

한편, <웃는 남자>에는 콤프라치코스로 불린 사람들이 등장한다. 빅토르 위고는 이들을 가리켜 인간적 추태의 일부라고 표현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콤프라치코스는 어린아이를 사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구매한 아이들은 도대체 어디에 쓰였을까? 콤프라치코스들은 아이들을 사서 왕을 위한 살아있는 장난감으로 만들었다. 희한하게 생길수록 재밌는 장난감으로 거래되었다. 점차 극단적인 기형을 선호하게 되니 급기야 전문 기술이 생긴다. 아이의 얼굴을 훼손했고, 정형외과적 지식을 동원해 뼈를 망가뜨리고 왜곡했다. <웃는 남자>에 등장하는 입이 찢어진 남자, 콤프라치코스가 입을 찢었던 아이가 조커의 원형이 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만약, 장발장이 거리에 버려진 코제트를 돌보지 않았다면 코제트는 어떻게 되었을까? 어떤 의미에서, 콤프라치코스가 괴물로 만들었던 아이들은 장발장의 눈에 띄지 못한 수많은 코제트들과 다르지 않다. 돌이켜보면, 빅토르 위고가 말하는 혁명은 매우 작은 데서 시작된다. 이웃의 버려진 아이를 모른 채 내버려두지 않고 속죄하는 마음으로 거두는 것, 비록 그의 가난과 고통이 나로 인해 비롯된 것은 아닐지언정 나와 무관한 것이 아님을 깨닫고 속죄하는 것, 그것이 바로 혁명의 씨앗이다. 내가 누리는 행운이 누군가 갖지 못한 행복의 일부라는 점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인간의 조건이며 인간다운 삶의 근간인 것이다.

 

네가 행복 속에서 겪고 있는 모든 것을, 그분은 불행 속에서 겪으셨다.” 장발장의 말처럼, 누군가 행복하게 겪는 많은 일들을 누군가는 불행 속에서 겪는다. 초경을 맞아 부모님께 선물을 받는 소녀도 있지만 그 사실조차 숨긴 채 운동화 깔창을 찾는 소녀도 있다. 아이를 낳아 행복의 눈물을 흘리는 부모도 있지만 너무나 막연해서 우는 부모도 있다. 장발장은 괴로워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 때문에 그토록 불행해진 여자! 팡틴이라고 말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 때문에 불행해진 사람, 우리는 그 개연성에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인간으로서 이웃을 대하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나향욱의 발언을 용서해서는 안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하철 안전문을 고치다 세상을 떠난 19살 청년을 향해, “그게 어떻게 내 자식처럼 생각되나, 그렇게 말하는 건 위선이다라고 말했다는 건 그가 타인의 고통에 완전히 무감한 사람임을 보여준다. 사람이라면, 최소 인간이라면 적어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 때문에 불행해진사람을 아파해야 한다. 내가 누리는 운수를 갖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고민해야만 한다. 그게 사람의 도리이며 최소인간의 기준이다. 나향욱은 정책기획관 자격이 없는 게 아니라 기준에 미달한 최소 인간 실격이다.

 

강유정 |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