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시간의 무게

또, 다시, 4월이다. 4월 이후, 슈퍼히어로가 등장하는 영화를 보기가 불편했다. 배가 침몰한다. 어린 학생들이, 한 학년이 전부 타고 있는 배가 침몰하고 있다. 슈퍼맨이 있다면 바로 그런 순간 등장해야 한다. 한 손으로 거뜬히 배를 바로 세우고, 고인 물을 빼낼 뿐만 아니라 이미 바다에 빠진 아이들을 구했을 것이다. 그날 이후, ‘슈퍼히어로물’이란 세상에 그래도 조금은 속을 여지를 가진 순진함 덕분에 가능한 장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슈퍼히어로가 등장하는 영화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 슈퍼히어로가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슈퍼히어로는 알리바이다.

시간은 흐른다. 미래로만 흐른다. 시간의 흐름은 일방향적이며 비가역적이다. 영화는 시간의 예술이다. 플래시백으로 흐름을 바꾸기도 하고, 비약적으로 시간을 건너뛰기도 한다. 심지어 아예 다른 시공간이 연결되기도 한다. 시간의 축 위를 미끄러지기도 하고, 시간의 제약을 아예 넘어서버리기도 한다. 워낙 많은 작품들이 나오다보니 장르명도 있다.

우리는 이렇듯 시간의 불가역성을 극복하는 상상력을 타임리프나 타임슬립이라고 불러왔다. <엣지 오브 투모로우> <시간을 달리는 소녀> <어바웃 타임> 등 수많은 영화들이 떠오른다. 그만큼 영화가 오래도록 사랑해온 서사적 소재인 셈이다.

최근 한국의 서사에 유독 시공간을 초월하는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어쩐지, 이런 우연이 우연 같지만은 않다. 시간을 돌이켜, 소중한 생명을 살리고 잘못된 일을 바로잡는 일들이 허구적 상상력 가운데 많아지는 것 말이다.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시그널>이 그 대표적인 예시이다. 이미 지나간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초월적인 힘으로 연결된다. 그 연결을 통해 과거가 바뀌고, 미래도 바뀐다. 죽었던 사람들이 살아나고, 살아야 할 사람이 죽기도 한다. 물론, 불가능하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의 시공간에서 시간을 휘어 과거와 맞닿게 할 방법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서사는, 더 강력히 그 시간의 휘어짐을 구상한다. 불가능하기 때문에 더 간절하다. 지극한 사랑을 통해 영화 <인터스텔라> 속의 아버지는 딸과 딸의 딸들, 후손을 구한다. 아버지는 말하자면 불확실한 미래를 구한다. <인터스텔라> 속에 그려진 웜홀 너머의 다차원 우주 공간은 간절한 바람이 투영된 소망의 공간이기도 하다. 과거의 딸에게 간절히 신호(시그널)를 보내고, 그 신호가 생명을 구원한다. 만일, <인터스텔라>가 지적 즐거움 이상의 어떤 감동을 준다면 그건 바로 그 끈질긴 사랑의 신호 때문일 것이다.



4월13일 개봉하게 될 곽재용 감독의 <시간이탈자>(사진)는 제목 그대로 시간의 축을 이탈한 사람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1983년의 남자와 2015년의 남자는 꿈을 통해 상대의 시간대를 경험한다. 1983년의 남자가 바라보는 여자를 2015년의 남자가 꿈속에서 보고, 2015년의 남자가 보는 사건파일을 1983년의 남자가 꿈꾸는 식이다. 이렇게 과거와 현재가 ‘꿈’이라는 매개로 이어짐으로써 두 남자는 혹여나 잃을 수도 있는 생명을 구하고자 한다. <시간이탈자>의 가장 밑바닥에 놓여 있는 정서, 서사적 추동력은 로맨스이다. 사랑하는 여자가 있고, 그녀를 위험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영화의 뼈대이다. 하지만, 주인공은 꼭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만 살리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말하자면, 인지상정의 마음으로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고 구하고 싶어 한다. 가령, 이런 장면 말이다.

둘 중 한 사람이 강당에 화재가 나는 것을 본다. 축제를 준비하는 고교생들을 강당에 가둔 채 누군가 방화를 한다. 연기가 퍼지자 아이들은 문을 향해 달려간다. 방화범에 의해 이미 문은 잠겨 있다. 아이들은 어떻게든 살기 위해 창살이 쳐진 문밖으로 손을 내민다. 내민 손들, 체육복, 교복을 입은 아이들의 팔목이 창살 틈으로 수없이 뻗어진다. 순간,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자꾸만 떠올랐던, 그래서 하던 일을 멈추고 멍하게 바깥을 바라보게 했던, 그 순간들이 떠올랐다면 그건 지나치게 예민하거나 강박적인 것일까?

손현주가 주연을 맡았던 영화 <더 폰>에서는 살해당한 아내에게서 전화가 온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기이한 현상으로 일 년 전 그녀의 시간과 일 년 후 그의 시간이 연결된 것이다. 그는 아내를 살리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한다. 포기하지 않는다. 다쳐도, 위험해도, 심지어 목숨에 위협을 느껴도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그녀를 사랑한다. 돌이킨 시간 속에서 그가 하고 싶고, 해야 하는 일은 단 하나이다. 바로 그녀를 살리는 것. <시그널>에도 그런 대사가 나왔던 듯싶다. “절대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시간은 하나의 방향으로만 흐른다. 시간의 흐름은 감지되지만 시간의 무게는 알 수가 없어서 자꾸만 깊이 가라앉는다. 영화는 시간을 접고, 휘고, 되돌아가고, 뛰어넘지만 현실의 시간은 무참히 앞으로만 흘러간다. 시간의 일회성, 삶은 일회적이고 죽음은 필연적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시간의 그 방향성 때문에 영화 속에서도 과거를 바꾸면 현재가 달라진다. 과거에 일어난 사고와 사건들은 현재의 삶을 변화시킨다. 과거의 사건은 일종의 시그널이기에 분명 사건 이전과 이후는 달라야만 한다. 적어도 영화 속에선, 사건 이후 세상이 달라지지 않았던가? 어떻게 그토록 엄청난 대형참사 이후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수 있을까?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면, 안타깝게도, 과거와 꿈을 주고받을 수 없다면, 적어도 사고 이후 현재만큼은 달라졌어야만 한다. 하지만, 과연 달라졌을까? 얼마나 달라진 것일까? TV드라마 속에서 장기미제 사건들은 모두 제자리를 찾아갔다. 하지만 지금의 단기미제가 미래의 장기미제 사건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시간을 돌이켜, 없었던 일로 만들 수 없다면, 지금은 무엇인가 많이 달라져 있어야 마땅하다. 아이언맨, 슈퍼히어로, 타임슬립은 영화에만 있지만 변화는 현실에도 있을 수 있다. 변화를 확인해야만 한다.



강유정 |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