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파수꾼의 윤리

사각지대(死角地帶)라는 말이 있다. 인간의 눈에는 시계(視界)라는 게 있어서, 어떤 위치에 섰을 땐 존재하는 것을 보지 못한다.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우리는 보이지 않으면 없다고 여긴다. 수많은 진실들도 그렇다. 대개 진실은 드러나지 않은 게 아니라 다만 눈을 돌려 바라보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주목을 뜻하는 ‘스포트라이트’는 그런 점에서 사각지대와 정반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어떤 부분을 밝게 비춰, 보라고 유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스포트라이트이다.

연극 용어에서 스포트라이트는 관객이 주목해야 할 부분을 알려준다. 조금 다른 의미이지만 각광을 받는다는 말도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 있다. 8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각본상을 받은 <스포트라이트>를 단순히 특종팀으로만 해석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주목을 받게 하는 것, 사각지대에 놓여 있어서 있되 보이지 않는 문제에 빛을 쏘아 세상에 드러내는 것, 그것이 바로 스포트라이트의 역할이고 언론의 역할이니 말이다.

이상적인 언론의 역할은 “사회정의 구현을 위한 파수꾼”이라고 할 수 있다. 파수꾼, 그러니까 정의를 구하고, 사수하는 게 바로 언론이다. 영화 <스포트라이트>는 그런 언론의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가감 없이’다. 한국에도 여러 편의 언론 영화들이 있었다. <모비딕>, <제보자>, <열정 같은 소리 하고 있네>와 같은 작품들이 언론의 역할을 전면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런 영화들에서 ‘기자’는 수많은 취업준비생들이 꿈꾸는 그럴듯한 직업으로만 그려지는 수가 많다. 그러니까, 진짜 언론의 속내와 구조, 어려움을 보여준다기보다는 언론 외부에 있는 사람들이 피상적으로 기대하는 언론인의 모습이 대략적으로 그려지고 마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그들은 언제나 은닉된 정의를 이끌어 내고, 진실을 밝혀낸다.

물론, 우리 사회에도 세상의 정의를 지켜내고 또 이끌어가고 있는 언론인들이 적으나마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언론의 역할을 영화화할 때, 즉 허구화할 때면 너무나 천편일률적으로 영웅적 결말에 치중한다는 것이다. 머리가 떡이 진 채 사무실에서 밤을 새운 모습이라든가 당혹스러운 취재 가운데 취재원에게 곤란을 당하는 등의 일이, 예상 가능한 순간 반드시 일어난다. 기자가 아니라 ‘기자 같은’ 사람들이 등장하고, 언론이 아니라 ‘언론처럼’ 보일 만한 클리셰들이 잔뜩 등장하는 것이다.


영화 <스포트라이트>의 한 장면


그런데, <스포트라이트> 속 집중취재반의 모습은 다르다. 우선 철저히 자료를 조사하고, 취재원을 확보하고, 짐작이 확신이 될 때까지 검증하고 또 검증하는 모습이 그렇다. 언론에 관한 영화가 ‘사실’을 찾아낸 이후부터 부장 및 국장과 같은 조직 내 권력과 싸우고, 그를 또 억압하는 외부 권력에 저항하는 과정으로 점철되는 한국 언론 소재 영화와 달리, <스포트라이트>에서 가장 처음 싸우는 대상은 바로 자기 자신들이다. 기사를 작성하게 될 그들이 혹시나 거짓된 자료를 모으거나 실수를 하지 않을까 스스로를 단속하고, 의심하고, 검열하는 것이다.

외압 없는 자발적 검열은 실로 경이로운 풍경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언론이 권력이 아닌 파수꾼이 되는 시작임을 알려준다. 언론이 가장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타자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다. 자신이 써내려갈 글이 사실이 아니라 거짓일 때, 그리고 순전히 사각지대를 비추리라는 의무감이 아니라 누군가를 찍어내고자 하는 욕망일 때,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지 그것을 먼저 걱정하는 것이다.

심지어 취재원과 대화를 나누는 보스턴 글로브 기자들의 모습은 무례할 정도이다. <스포트라이트> 속 기자는 에둘러 진실을 얻으려 하지 않고, 진실을 말해야 할 당위를 설명하고 상대를 설득시킨다. 비밀 녹취나 다리만 나오는 스파이샷의 접근과는 다르다.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원리를 다시금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스포트라이트>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보스턴 글로브지의 집중취재반이 삼십여년간 지속적으로 자행돼온 가톨릭 사제들의 미성년자 성폭행 사건을 밝혀낸 일이다. 잘못을 저지른 사제들이 벌을 받고, 생존자들에게 정의의 몫을 돌려주었다는 게 결론이지만, 그렇다고 아예 이런 문제들이 발본색원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영화도, 영화 속 언론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누가 죄인인가 밝혀내는 것 자체가 아니라 하나의 범죄란 여러 사람, 여러 층위가 함께 만들어 낸, 구조적 침묵의 합작품이라는 사실이다. 모두들, 보고 싶은 방향만을 보고 보아야 할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을 때, 사각지대는 우범지대가 될 수밖에 없다.

<스포트라이트>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도 바로 여기다. 그들은 지금껏, 삼십년간 범죄가 묵과될 수 있었던 까닭 중 하나에 스스로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자인한다. 가톨릭 사제들과 그들을 묵인한 신도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을 도와준 변호사, 시끄러운 일들을 덮고자 했던 지역 사회의 사람들 모두 공범인 것이다. 본분을 다해서가 아니라 본분을 다하지 못했다는 인정에서 영화 <스포트라이트>의 윤리가 발생한다. 윤리란 그런 것이다. 만약, 잘못과 실수가 있었다면 그것을 인정하고 다시 본분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 잘못을 덮기 위해 더 큰 위장막을 설치하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는 것 말이다. 그게 진짜 정의의 시작일 것이다.



강유정 |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