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상처입은 복숭아 맛

요즘은 농사법이 발달해 제철 개념이 많이 사라졌다. 찬 바람 불면 농익은 포도가 맛있는 때인지라, 아는 농민에게 전화를 했더니 이미 7월에 출하를 마쳤단다. 시설 재배로 바꾸면서 출하시기가 빨라졌기 때문이다. 철을 앞당기면 작물값이 좋을 확률이 높다. 게다가 여러 이점도 더 있다. 유기농 재배하기도 편하고(인근 밭에서 벌레가 넘어오기 어렵다), 재배와 수확에 편리하게 환경을 조절할 수도 있다. 그래도 바람이 싸늘해지고, 대낮에도 긴팔을 입어야 할 때 먹는, 잘 익은 과일의 맛을 생각하면 전통적인 제철이 그립기는 하다.

 

 

복숭아도 제철이 당겨진 듯하다. 포도야 넝쿨처럼 자라고, 키 작게 기르기 좋아서 일찌감치 하우스 안에 들어갔다 치지만 복숭아도 그럴 줄 몰랐다. 복숭아도 이젠 시설 속에서 키우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 덕에 더 빨리 다디단 복숭아 맛을 볼 수 있는 모양이다.

 

시장에 이미 좋은 복숭아가 많이 나오고 있다. 물 많고 달아서 즙이 줄줄 흐르는 백도와 황도의 맛! 예전에 늦여름 시장에 가면 복숭아 냄새가 시장이 가득 찰 지경이었다. 어떤 향기로움도 대체할 수 없는 복숭아만의 녹진한 향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차가운 우물물을 퍼서 복숭아를 함지에 담가두면, 마당에 복숭아 향이 퍼졌다. 복숭아 독이 오른다고 어린애들은 만지지 못하게 했지만, 함지에 손을 담그고 복숭아를 빠득빠득 씻던 재미는 오래 기억에 남아 있다. 그때 어머니는 늘 어딘가 상처 입고 한 곳이 갈색으로 짓무른 것을 즐겨 사들였는데, 달리 이유가 있었다. “어디 이운 데가 있어야 달고 진해. 한 곳이 물러진 복숭아는 빨리 상하는데, 우리가 사주면 장사꾼도 좋지.” 과연 어머니의 말씀은 옳았다. 복숭아는 설탕에 재어둔 것처럼 달았다. 씨에 붙은 과육까지 빨아먹었다. 바삐 먹어치운 후 입술 주변에 남던 옅은 통증도 기억나지 않는가.

 

함께 일했던 요리사 후배가 있었다. 추석 휴가를 받을 때면, 그이에게 직원들이 부탁을 하곤 했는데 다름 아닌 복숭아였다. 집안에 복숭아 농장을 하는 이가 있어서 그 무렵이면 우리에게 보낼 복숭아를 챙겼던 것이다. 복숭아가 얼마나 실하고 좋은지, 상자를 받으면 넘쳐나던 향으로 어질어질해질 정도였다. 나는 늘 ‘파지’라고 부르는 걸 주문했다. 시장에 낼 때 아무리 맛이 좋아도 모양이 찌그러지거나 상처가 있으면 받아주지 않거나 제값을 못 얻는다. 그런 건 이렇게 ‘직거래’로 팔곤 하는데, 오히려 나 같은 이에겐 각별하게 맛있는 놈이었다. 어머니에게 배운 교훈이랄까. 더 달고 향 좋은 놈이 상처 입는 법. 껍질을 살살 벗기면 뭉클한 속살이 가득한, 맛 좋은 복숭아였다.

 

올해부턴 이것도 어렵게 됐다. 그 후배가 외국으로 공부하러 떠나 복숭아밭에 갈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태풍이 온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나는 제일 먼저 복숭아를 생각했다. 이제 곧 수확철인데 나무에 온전히 매달려 있을지. 그건 복숭아만의 일이 아니겠다. 올해 유난한 더위에 농사짓느라 고생한 농민들의 수확물을 태풍이 다 떨궈버리지는 않을지. 다들 기도해 주시길 바랄 뿐이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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