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칼럼

[서정일의 보이스 오버] 위험사회의 징조

영화 <타워링>의 포스터

 


1970년대 초반 할리우드의 대세는 재난영화였다. 20세기폭스에서 제작한 해양재난물 <포세이돈 어드벤처>가 대박을 쳤다. 이에 자극받은 워너브러더스에서 고층 빌딩의 화재 사건을 소재로 도시재난물을 기획하지만 폭스에서도 같은 소재의 영화를 준비한다. 막대한 제작비가 투입될 블록버스터가 같은 소재로 맞붙는다면 두 제작사 모두에 재앙이 될 게 뻔했다. 쇼비즈니스에서 양보란 미덕은 없다. <타워링>은 거대 제작사 두 곳이 합작해 만든 최초의 영화가 되었고 기대대로 크게 성공했다. 

마천루의 화재를 다룬 <타워링> 제작의 중심에는 프로듀서 어윈 앨런이 있었다. <포세이돈 어드벤처>의 물난리에 이어 <타워링>의 불난리까지 어윈 앨런의 솜씨는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타워링>의 불씨는 <분노의 역류> <다이 하드> 그리고 한국영화 <타워>에 옮겨붙을 만큼 스펙터클한 비극의 원형이다. <타워링>의 원제는 ‘타워링 인페르노’로 솟구치는 지옥을 뜻한다. 초고층 빌딩의 화재는 욕심이 부른 인재였고 지옥의 불기둥으로 형상화되었다. 불지옥 속 아비규환과 살아남은 자들의 시선을 통해 관객이 목격하는 그을린 윤리는 1970년대 할리우드 웰메이드의 전형이다.

재난영화의 효용은 강도 높은 긴장이 가져다주는 쾌감이 우선한다. 죽음의 위기를 감각적으로 추체험하여 얻는 재미가 8할이지만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지체 없이 노출되는 인간의 본능과 합리와 윤리 사이의 딜레마가 자극하는 흥미도 한몫한다. 

재난영화에 등장하는 비호감역 혹은 악역은 냉정히 보면 본능에 충실할 뿐인데 비난을 받는다. 자신의 목숨을 우선시하는 게 상찬받을 태도까지는 아니나 욕을 먹을 이유도 없다. 문제는 위선이다. 재난영화의 작은 악당들은 재난이 닥치기 전까지 공정하며 정의로운 사람으로 처신하다 위기를 맞으면 망설임 없이 평범함을 자백해버린다. 이해득실에 따라 고상함에서 범상함으로, 그 역으로 위상을 이동하는 위선자는 권선징악의 후련한 제물이 된다.

위선의 폐해는 현실에서 더 혹독하다. 위선적인 정치인이나 관료가 군림하는 국가는 위험사회에 최적화돼 있다. 울리히 벡은 현대를 위험사회로 규정했다. 위험사회의 위정자는 성장과 이익을 위해 위험을 감수한다.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이 감당한다. 경계심을 해소시키기 위해 전문가 집단이 나선다. 어용학자들은 위험성을 축소하며 방어한다. 물론 그들은 책임에서 자유롭다. 우리는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가공할 만한 참상을 보았다. 현대의 사고는 회복하기 어렵고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초월한다. 후세와 인접 국가에 영향을 끼친다. 누군가 위선의 탈을 벗고 책임을 진다고 해도 이미 파괴된 환경과 꺼진 생명에 무엇으로 보상을 할 수 있겠는가. 

올여름 수해로 커다란 재산 손실과 인명 피해가 있었다. 이 정부의 안일한 예방과 허술한 수습 과정을 지켜보는 국민은 분노했고 안전에 대한 불안감이 높아졌다. 결국 몇 달 지나지 않아 길에서 158명이 사망한 참사가 터졌고 정부는 변함없이 무책임하다. 수만명이 모일 거란 예측에도 납득하기 어려운 소홀함으로 발생한 대형 인재였다. 관료들의 무도함에 애도의 시간은 원한으로 채워져 유가족은 망자를 떠나보내지 못하고 있다. 

통곡하는 유가족을 연민하다 더 큰 위험이 닥칠 가능성이 높다는 불안감에 서늘해진다. 얼마 전 정부는 전력 확보를 위해 노후 원전의 수명을 연장하고 새로운 원전을 건설하겠다고 발표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방사능이 유출된 적이 없다는 주장에 이어 원전 안전을 중시하는 사고를 나무라기까지 한 분이다. 큰일이다. 안전을 무시한 채 원전에 몰두하고 있는 대통령에게 국가의 운명이 맡겨졌다. 한국은 고강도의 위험사회로 진입했다. 두렵다.

<서정일 명필름랩 교수>

 

 

연재 | 서정일의 보이스 오버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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