콰이강의 다리 위에서 화해한 에릭 로맥스(왼쪽)와 나가세 다카시.
경쾌한 휘파람 행진곡으로 유명한 <콰이강의 다리>는 1958년도 아카데미 작품상을 비롯해 주요 부문을 석권한 명화다. 일본군 군수품 수송을 위한 버마-시암(미얀마-태국) 간 철도, 일명 ‘죽음의 철도’ 공사에 동원된 영국군 포로들과 일본군의 갈등을 그리고 있다.
영국군 포로를 대표하는 니콜슨 대령은 견고한 원칙주의자다. 제때 공사를 마쳐야 하는 일본군 사령관은 총동원을 명령한다. 니콜슨은 장교는 지휘할 뿐 노동하지 않는다며 원칙을 고수하며 거부한다. 자신과 장교들의 목숨을 건 위험한 저항 끝에 사령관의 고집을 꺾은 니콜슨은 영국군의 선진 기술과 경험을 자랑하며 명예롭게(?) 다리 건설에 참여한다. 일본군의 전승을 위해 튼튼하게 축조되는 다리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니콜슨 대령은 전쟁의 부조리함을 체현하는 인물이다.
10만명 이상이 사망한 ‘죽음의 철도’ 건설에 투입됐던 영국인 에릭 로맥스는 <콰이강의 다리>가 불편했다. “저렇게 살찐 포로가 있었다니….” 일본군의 악랄한 폭행과 끔찍한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한 로맥스의 눈에 영화 속 포로의 처지는 실제와 거리가 멀었다. 로맥스는 사경의 공포, 파괴된 존엄성 그리고 가해자에 대한 원한으로 분열된 인생을 기록한 회고록 <레일웨이 맨>을 발표했다. 회고록은 콜린 퍼스와 니콜 키드먼 주연으로 영화화되었으나 원작의 가치라 할 수 있는 화해와 용서를 마주하며 겪는 또 다른 고통을 전달하지 못했다.
시도 때도 없이 발작하는 분노와 복수심으로 불안정하던 로맥스는 고문 가해자였던 나가세 다카시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어눌한 영어로 다그치며 물고문을 가하던 악마 같은 통역장교가 속죄하며 ‘화해’의 만남을 조직해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심경이 복잡해진다.
나가세는 <십자가와 호랑이>란 책을 통해 포로수용소 안에서 자행된 일본군의 잔혹한 폭력과 자신이 받은 심리적 고통을 토로했다. 어이없게도 7000명의 전사자들 묘지 앞에서 용서받은 영적 체험을 감격하여 적어놓았다. 피해자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신에게서 용서를 받았다는 가해자의 파렴치한 자기구제 퍼포먼스. 로맥스의 부인은 나가세에게 항의 편지를 보냈다. 예상치 못한 나가세의 진심이 담긴 사죄 답장이 이어지면서 속죄와 용서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전범 군인으로서 나가세는 평생 뉘우치며 살았다. 일왕의 이름으로 일본군이 저지른 만행을 고발하는 한편 희생자들을 위한 사원을 세워 영령을 위로했다. 2007년에 교토에서 열린 ‘전쟁의 진실을 말하는 모임’에 고령에도 불구하고 참석해 일본군이 조선인 위안부를 강제 연행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경향신문 2007년 7월9일 기사)
나가세를 겨우 용서한 로맥스는 야스쿠니 신사를 방문한 후 일본마저 용서하기는 어려웠다. 일왕을 위해 목숨 바쳐 다른 나라를 괴롭힌 일제국주의 전범들을 칭송하고 있는 야스쿠니 신사는 마치 ‘독일 성당에서 게슈타포 기념비를 보는 기분이었다’며 불쾌해했다. 야스쿠니 신사에는 ‘죽음의 철도’ 건설을 위해 침목 하나당 목숨 하나를 강요한 A급 전범자 도조 히데키와 죽음의 철도 개통식에 동원된 증기기관차 C 56 13호가 자랑스럽게 전시돼 있다. 태국이 ‘죽음의 철도’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를 시도하고 있으나 일본이 반대하고 있다. 일본은 과거의 죄를 지우려고 애쓸 뿐 사과나 반성은 없다. 일본의 역사 인식은 퇴행적이다.
에릭 로맥스의 경우처럼 피해자는 가해자에 대한 복수와 용서 사이에서 다시 고통을 느낀다. 우리는 일본에 복수할 악의는 없지만 일본을 용서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 우리가 아플 이유는 없다. 폐기해야 마땅할 욱일기를 펄럭이는 일본함에 경의를 표하는 한국 해군의 굴욕이 수치스러울 뿐이다.
<서정일 명필름랩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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