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부한 인문과 교양의 시작은 좋은 글과 문장이다. 요새 클래식을 매개로 한 재기발랄하며 깊이 있는 문장가들이 서로 경쟁하듯이 언론과 학계, 예술가 사이에서 많이 나오고 있는 걸 보면 전성기의 도래를 실감한다.”
지난 7월 이 지면에 쓴 내 칼럼의 한 대목이다.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놀라운 연주로 밴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우승한 직후였다. 나 또한 감동(아니 흥분)하여 이 무렵 ‘한국 클래식의 르네상스’라는 글을 썼었다. 우선 임군과 같은 수많은 젊고 훌륭한 연주자들의 등장을 주목했다. 지금이 클래식 르네상스, 즉 전성기라면 그 시대의 주역은 그들의 몫이어야 한다. 당연한 얘기다.
하지만 정작 그때 칼럼에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 너머’에 있었다. 앞의 인용문에 그 의도가 담겨있다. 마침 글 잘 쓰는 클래식 전문가들이 많이 눈에 띄었고, 읽어보면 내용도 알차고 좋았다. 이 부류도 클래식 전성기의 ‘숨은 조연’ 정도는 충분히 되겠다 싶었다. 관련 분야의 글이 풍부해진다는 것은 인재들이 몰린다는 뜻도 되고, 관련 시장도 넓어진다는 징표이기도 하니 금상첨화 아닌가. 특히 베토벤이나 모차르트 등의 텍스트 고전이 존재하는 클래식 음악 분야는 현장 경험 못지않게 인문교양의 깊이가 필자의 역량을 좌우한다.
그러나 몇몇 그 글쟁이들에 대한 기대가 아쉽게 되는 계기를 만났다. 칼럼을 치하한 것이 무색하게 실망을 주는 사례를 경험하고 기대감을 낮췄다. 판단 미스였다고 할까. 평소 눈여겨보았던, 칼럼의 동기가 된 전문가들에게 내 일터에서 글을 맡겼다. 뉴스레터를 발행하면서 매번 주제를 정하여 필진을 찾았다. 다들 청한 주제에 맞게 글과 내용은 참 좋았다. 나중에 실망을 안긴 필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거기까지. 뉴스레터가 나간 1주일 뒤, 한 일간지 기명칼럼에 실린 어느 필자의 글은 우리 뉴스레터의 내용과 상당히 일치했다. 마티네(아침음악공연)에 관한 같은 주제이니 빤한 현장 사례가 담긴 내용도 비슷할 수밖에 없겠다 싶긴 했으나, 열심히 찾아 시류에 맞는 주제를 정하고, 실제 공연과 연결하여 소식을 전하려다 당한 실망감은 컸다. 그 필자에게도 사정이 있겠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런데 아뿔싸! 그보다 좀 더 심한 사례가 곧 또 터졌다. 거창하게 말해 클래식 음악의 생존력에 관한 주제였다. 코로나19 팬데믹이나 디지털 시대 등 온갖 세상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클래식이 강한 이유와 가치 등에 관한 것. 어느 대학에 있는 그 필자의 문장은 여느 때처럼 재기발랄했고, 연주자 출신답게 깊이도 있었다.
그러나 여기까지. 뉴스레터의 그 글은 1주일 뒤, 역시 어느 일간지 자신의 기명칼럼에 ‘거의’ 그대로 실렸다. 거의에 따옴표를 한 것은 많은 양보의 뜻을 담아서다.
이 필자는 일면식도 없지만, 여러 경로의 글을 읽고 매력을 느껴 특별히 글을 청했기 때문에 아쉬움은 더욱 컸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자괴감이 먼저 들었다. 뉴스레터 정도는 무시해도 되겠지 하는 무신경한 태도에 화도 났다. 전자의 감정은 개인적으로 털어버리면 그만이다. 하나 후자는 자칫 고약해질 수 있는 사안이다.
파급력과 권위 면에서 뉴스레터가 별로라고 판단하여 일간지에 거의 같은 글을 다시 실었다면 오산이다. 뉴미디어시대 글은 선후 관계가 중요하다. 거의 동시에 나온 그 글이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다 보면, 글의 첫 출처가 헷갈리게 된다. 사실이 뒤바뀔 수 있는 일이다.
글은 글쓰는 사람의 속마음을 닮는다고 한다. 글쓰는 사람으로서 나 또한 이런 비슷한 실수가 없으란 법도 없다. 이번 경험은 내게도 경종이 되었으니 오히려 그 필자들에게 감사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한국 클래식 음악의 르네상스를 또렷하게 주장하기엔 겸연쩍어졌음을 고백한다. 잠시 유보해야 할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정재왈 예술경영가·고양문화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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