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칼럼

[서정일의 보이스 오버] 청각 교란의 시대



빛이 있으라는 신의 음성과 함께 세상이 시작되었다. 소리는 우주의 기원이다. 청각은 전방위적으로 켜져 있다. 문명은 오랜 기간 청각에 의지해왔다. 귀 밝은 이들은 선대가 전하는 정보를 활용하고, 후대에 전했다. 잘 듣는다는 것은 귀한 자질이었다. 인류는 정보의 양이 많아지고 복잡해지자 이야기 형식을 고안해 기억을 도왔다. 이야기는 유흥이 아닌 생존을 위한 교육이었다. 단백질 확보를 위한 사냥의 적시와 적소, 맹수의 숨통을 끊어버리는 필살기가 부족의 영웅서사에 담겨 전습되었다. 이야기를 듣다 한눈을 팔거나 졸다가는 사냥터에서 돌아올 수 없었다. 잘 듣는 자만 살아남았다. 이때의 습성이 유전되어 우리는 소설과 영화 같은 서사 양식에 시간과 돈을 쓴다. 

영화를 본다고 표현하지만 사실은 이야기를 듣는 것에 다름 아니다. 발성영화 도입 이후 영화는 세련된 서사 구조를 확립할 수 있었고 대사는 핵심 기능이다. 대사는 인물을 입체화하고, 극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며 플롯을 추진한다.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본능에 맞춰진 장치다. 대사는 편집과 믹싱 공정을 거쳐 전달력을 강화한다.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 주위 관객의 잡담, 취식 소음으로 대사 청취가 어려울 때 짜증이 난다. 외국영화라면 자막으로 소화할 수 있어 그나마 낫지만 한국영화에서 대사를 듣지 못하면 자칫 이야기의 맥락마저 놓칠 수 있어 불쾌감은 배가된다. 

요즘 한국영화를 볼 때 대사가 뭉개져 전달이 안 된다는 불만이 많다. 촬영 현장에서 대사 수음이 불량했거나 믹싱 과정에서 대사와 음향 및 음악의 조합이 어긋났거나, 아니면 두 가지가 결합된 문제일 수 있다. 같은 영화를 넷플릭스 등에서 한국어 자막 기능을 켜고 재감상했다는 관객도 적지 않다.

<한산: 용의 출현> 제작진은 이 같은 관객의 불만에 기민하게 반응했다. 아비규환의 전장 속에 묻힐 뻔한 대장군의 언어를 자막으로 살려 큰 호응을 얻었다. 대사 청취의 문제는 다행히도 관객의 청력 문제가 아닌 기술 문제라 나름의 해결책을 찾아 가고 있다. 

잡음 속에서 신호를 잡아내는 감별력에서 생존과 번영을 위한 정보가 용해된 이야기 감상력까지 우리의 청각은 믿을 만한 감각기관으로 진화해왔다. 원활한 관계 형성의 초석은 말하는 기술보다는 듣는 기술에 있다. 언어의 한계를 감안할 때 경청의 기술은 절실하다. 

안타깝게도 민심에 귀 기울여야 할 여의도는 대표적 난청 지역이다. 정치인들의 난청과 딴청으로 국민은 혈압이 오른다. 외교 현장에서 노출된 대통령의 상스러운 언행에 국민은 경악했다. 국민은 귀를 의심했다. 한쪽 귀마저 의심케 한 것은 한참 뒤 발표된 대통령실의 해명이었다. 해명을 빙자한 해괴한 진단이었다. 국민에게 계속 귀를 의심하란다.

홍보수석의 근엄한 언어폭력에 이어지는 여권 인사들의 가증스러운 말장난. 무편집 영상에 고스란히 실린 대통령의 비범한(?) 문장은 해체되고 재해석되었다. 

미국 국회를 향한 욕설은 한국 야당을 향했다가 끝내는 대통령의 망각 선언으로 휘발되었고 ‘날리면’을 굳이 ‘바이든’으로 들은 다수의 국민들은 하루아침에 난청 환자로 전락했다. 최초 보도한 언론사를 국민의 청각을 교란시켜 국익을 해쳤다고 단죄한다. 불량한 국민의 청각과 불경한 언론의 시각은 교정과 처벌 대상일 뿐이다. 누가 청각을 교란한 것인가. 여권의 정치적 착란이자 저열한 적반하장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후보 시절 전문가들의 조언에 귀 기울이며 국정을 운영하겠노라 약속했다. 

한데 집권 후 국정의 난맥상은 점입가경이다. 대통령 주위에 포진한 전문가의 수준 문제인가, 대통령의 난청 문제인가. ‘귀가 막히는’ 시절이다.

<서정일 명필름랩 교수>

 

 

 

연재 | 서정일의 보이스 오버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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