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칼럼

[정재왈의 아트톡] 창신해야 법고도 산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서거를 계기로 쏟아져 나온 많은 어록 가운데 나에게 가장 인상적인 말은 현대와 대화하려는 역사와 전통에 관한 것이었다. “현재의 상태를 지키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바꿔야 한다.” 대명천지 민주국가에서 군주제의 한계를 직시하면서 안정적으로 70년 권좌를 지킨 여왕의 용단이 놀라웠다. 단순 현상유지가 아니라 시대의 변화에 적응해 나갈 때 오히려 현상을 더 견고하게 지킬 수 있다는 역설의 지혜에 간담이 서늘하다.

넷플릭스 드라마 <더 크라운> 시리즈 초반에 엘리자베스 여왕의 대담한 결단력과 감각의 일면을 볼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처칠 총리 등 노련한 정객과 국제정치 문제에 직면한 여왕은 지식의 부족을 절감한다. 

이때 독선생으로 삼은 이튼스쿨 부학장이 헌법은 ‘위엄’과 ‘효율’로 구성된다고 말한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린다. 

왕은 위엄, 행정부는 효율이라는 두 권력의 성격을 설명하면서 신뢰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 ‘신뢰’라는 단어에 밑줄을 그었던 여왕은 나중에 자신을 속인 독불장군 처칠의 행동을 그 잣대로 질타하면서 꼼짝 못하게 휘어잡는다.

위엄과 효율 가운데 내가 주목하는 것은 효율이란 덕목이다. 광범위한 행정의 영역에서 강조되는 효율은 절대반지가 아니어서 손상받기도 쉽다. 특히 문화행정과 예술경영에서 효율성 추구는 자칫 이단 취급을 받는데, 효율을 순전히 시장가치로만 보는 경향 때문이다. 그게 아니란 걸 다시 영국의 사례로 짚어본다. 

오랫동안 현장에서 영국 문화정책의 양상과 변화를 체감하면서 나름 두 가지 특징을 발견했다. 하나는 그게 매우 현실주의적이라는 점이다. 현실적이라는 것은 시장의 변화에 민감하다는 이야기다.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이젠 한국의 모델이 된 ‘예술위원회’를 발족하여 정부의 예술지원을 가장 먼저 제도화한 나라다. 그런데 영국은 장르 중심 순수예술 지상주의에서 벗어나 시장 친화적 지원제도를 발전시켜왔다.

자연스레 그 결과는 탈경계, 융복합, 최첨단 등 매우 창의적인 활동과 작품의 생산으로 이어졌다. 이젠 오랜 슬로건이 됐지만 ‘쿨한(참신한) 영국’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화력발전소를 개조한 미술관(테이트모던)으로 현대미술의 흐름을 바꾸고, 셰익스피어의 연극 전통을 되살린 극장(셰익스피어글로브)을 고증으로 되살려 관광객을 모으고, 첨단 확장현실(XR) 기술을 발 빠르게 문화예술 분야 미래 전략산업으로 정하는 일련의 활동 등이 그 예에 속한다. 여왕의 심정처럼, 변화해야 현재가 지속 가능하다는 절절함의 소산이다.

장엄한, 아주 정교하게 짜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장례식을 보면서 장구한 왕조시대를 거친 우리는 그런 역사와 전통이 없을까 생각해 봤다. 순간 다채로운 이미지가 떠올랐다. 조선시대 국가와 왕실의 주요 행사 내용을 그림과 문서로 정리한 위대한 기록문화유산, 바로 의궤(儀軌)였다. 의궤는 의식의 본보기(전범)와 규범을 뜻하는데, 시각자료로 가장 유명한 게 의례에 참여한 문무백관의 차례를 그린 반차도(班次圖)다. 왕의 즉위 등을 축하하는 가례와 국상 등의 의전을 촘촘히 담고 있어 사료적, 미적 가치가 뛰어나다. 자료를 살펴보니 여왕 장례의전을 보면서 느낀 상실감이 순식간에 자부심으로 바뀌는 쾌감을 느꼈다.

법고창신(法古創新). 전통문화와 현대의 관계를 말할 때 자주 쓰는 말이다. 법고는 옛날의 법도요, 창신은 그것을 새로운 것으로 거듭나게 한다는 뜻이다. 앞서 언급한 위엄과 효율에 비유한다면 의례에 해당하는 법고는 위엄의 상징이요, 효율은 창신의 가치일 것이다. 

그런데 두 가치가 현실에서 만나 조화를 이루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아무래도 법고주의자는 전통의 보존에, 효율 추구자는 변화에 방점을 두다보니 신뢰 형성이 잘 안 된다. 어느 분야에서든 지속 가능한 미래를 상정한다면, 창신해야 법고도 산다. 의궤도, 궁궐이라도 다를 게 없다.

<정재왈 예술경영가·고양문화재단 대표>

 

 

 

연재 | 정재왈의 아트톡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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