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칼럼

[서정일의 보이스 오버] 자결한 감독, 시네마의 황혼



장뤼크 고다르 감독(사진)이 자결(自決)했다. 세상과 불화한 노감독의 죽음은 안락사로 타전되었지만 공식적으로 ‘조력자살’이었고, 엄밀히는 자결이었다. “그는 아팠던 게 아니라 고갈된 것입니다.” 유가족은 노감독의 결단 배경을 간명하게 설명했다. 더 이상 표현할 것이 없으니 끝내겠다는 단호한 결정의 과정에는 고다르의 예술적 이력이 함축되었고 유언에 값하는 울림이 있었다.

당돌한 데뷔작으로 출발해 도발적 실험작으로 이어진 고다르의 모든 작품은 영화를 주제로 응축되었다 확장되는 변주곡이었다. 영화가 주인공이자 배경이자 사건인 영화. 청년 고다르는 옛날 영화를 보고 시네클럽에서 토론하며 영화와 접속했다. “밤이었다…” 이후 한 문장도 더 쓰지 못한 소설, 그림도 그려봤지만 안 맞았다. 표현 도구로써의 영화를 발견했지만 궁핍한 청년은 필름 대신 종이 위에 영화를 찍었다. 영화 월간지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 본격적인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고다르에게 비평은 곧 영화 만들기였다. 

카이에의 동인으로 에릭 로메르, 자크 리베트, 클로드 샤브롤 그리고 절친 프랑수아 트뤼포를 만났다. 이 ‘청년 터키당’은 아버지 세대 영화와 절연하며 새로운 영화 시대를 열었다. 카이에 동인들은 트뤼포를 필두로 속속 감독으로 데뷔해 누벨바그의 중심에서 활약하며 역사를 찍어나갔다.

누벨바그의 개성들 중에서도 고다르는 별났다. 광고 영상 편집일로 커리어를 시작한 고다르는 영화 문법의 불문율인 연속성에 의문을 품고 점프컷으로 관객을 당황케 했다. 나눠 찍은 개별 숏을 자연스럽게 이어 붙여 관객이 극에 몰입할 수 있도록 편집하는 것이 지금까지도 보편적인 편집법이다. 

점프컷은 미숙한 편집으로 오인받을 수 있는 위험한 시도임에도 자기 멋대로 편집해 개봉했다. 고다르의 이런 태도는 문제적 데뷔작 <네 멋대로 해라>의 제목 번역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고다르는 제작사의 통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당시 뉴미디어였던 비디오를 대안 매체로 삼아 영화작업을 이어간다. 비디오 작업의 한계를 느껴 다시 상업영화 제작 현장으로 복귀하지만 순탄치 않았다. 복귀작 &lt;누벨바그&gt;의 주연 알랭 들롱이 시나리오에 기재된 차와 실제 소품 차량이 다르다며 촬영을 거부했다. 고다르는 까탈스러운 슈퍼스타의 요구에 차 대신 당나귀를 대령했다. 알랭 들롱의 쓸데없는 고집을 당나귀 같다고 비판한 것이다. 자칫 제작이 중단될 수 있었음에도 개의치 않았다. 고다르는 시대와 불화했고 굽히지 않았다. 그런 감독이었다.

고다르는 촬영 전날 밤새 고민한 연출 계획을 촬영 직전에 폐기한다. 지금 자기가 찍으려는 방식대로 찍으려는 감독이 1000명은 될 거라 스스로 경고하고 다르게 찍는다. 스태프들 입장에서는 감독의 변덕으로 작업에 지장이 생기니 난처하고 짜증난다. 제작자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제작비와 함께 혈압이 상승한다. 마찰이 빈번할 수밖에 없다. 고다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음에 들 때까지 액션과 컷을 외쳤다. 그렇게 영화를 만든 감독이었다.

고다르의 영화는 질문하고, 질문하는 방식으로 영화가 존재한다. 영화의 기능에 의지하지 않고 영화의 가능성을 탐색한 고다르의 영화 작업은 고단한 창작 행위였다. 고다르의 영화는 대중에게 환영받지 못했지만 비평가와 영화학자들은 그가 진단하고 전망한 영화적 개념들에 자극을 받고 아이디어를 얻었다. 고다르의 말년의 영화 형식은 ‘영화 에세이’에 가까웠고, 한편으로는 영화사 안으로 침잠해 이미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바탕으로 한 교육자의 면모였다.

극단의 탐색 끝에 고갈된 상황을 맞은 노감독은 삶의 마지막 컷을 외치고 떠났다. 레만 호수 위로 시네마의 황혼이 붉게 저물어간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서정일 명필름랩 교수>

 

 

 

연재 | 서정일의 보이스 오버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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