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역사 속 패배 곱씹기, 일상에 없는 승리 심기

작곡가 류이치 사카모토의 전시회 첫 번째 순서에는 그가 지금껏 만들었던 영화 음악과 영화 그리고 그것의 현대적 재해석을 담아 놓은 영상물이 자리잡고 있다. 익숙한 선율에 어우러진 영상들은 대개 외국의 영화들이다. 그중 낯익은 한국 영화가 한 편 있는데, 바로 <남한산성>이다. 2017년, 작년 이맘때쯤 선보였던 영화 <남한산성>은 드물게 패배의 이야기이다. 그것도 실제 역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전시를 위해 편집된 짧은 화면 속에서도 인물들은 모두 좌절과 패배감에 젖어 있다. 그 표정은 가히 굴욕에서 빚어져 나오는 슬픔과 회한이라 할 만하다. 여기엔 허구적 과장이나 영화적 복수 같은 게 있을 틈이 없다. 호평에도 불구하고 대단한 흥행 성적을 거두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실제로도 패배한 치욕의 순간을 재연해 확인하고, 다시 한번 굴욕감을 경험하는 것. 그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아니 진짜 어른이라야 그런 패배감을 감당할 수 있다.

 

영화 <협상>의 한 장면.

 

2018년 추석 영화들이 공교롭게도 모두 승리의 결말을 담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중 영화는 우리가 실제 경험하기 어려운 통쾌한 성공을 자주 보여준다. <암살>에서 김구 선생의 지령을 수행할 수 있는 것도, <내부자들>에서 내부 고발자가 안전할 수 있는 것도 사실보다는 허구적 정의에 더 가깝다. 옳다고 현실에서 이뤄지리라는 법은 없다. 음모나 술수, 협잡의 달인들이 오히려 더 높은 곳까지 올라가 권력을 잡곤 한다. 힘에 혈안이 된 낭인들이기에 뭔가 손에 잡히면 휘두르기 마련이다.

 

덕으로 보나, 의로 보나 그 몫에 값하지 못하는 자들이 가당치 않은 권력과 재력을 갖고 남용하고, 탕진한다. 그런데 영화에서만큼은 그들은 혼쭐이 난다. 벌을 받고, 망신을 당하고, 법의 심판을 받는다. 어쩌면, 그래서 우리는 더욱 영화적 정의라도 갈급하는지 모르겠다. 홍길동이 조선에서 찾을 수 없었던 정의와 법을 율도국에 세우는 것처럼 우리는 영화 속에서 나름의 율도국을 찾고자 한다.

 

<협상> <물괴> <명당>과 같은 추석 영화들은 모두 하나같이 정통 장르 영화임을 강조한다. <물괴>는 사극과 크리처물의 결합이 처음임을 강조하고 <명당>은 역사와 액션, 스릴러, 민속학의 결합을 부각시키고자 한다. <협상> 역시 한국 영화 사상 거의 볼 수 없었던, 협상가를 등장시켜, 새로운 범죄 스릴러의 지평을 열겠노라고 선언했다.

 

세 작품 모두 겉모습을 보자면 스스로 천명한 장르에 부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괴>에는 정성껏 컴퓨터 그래픽으로 손본 괴물이 등장하니 크리처물이 맞고, <명당>은 실존했던 흥선군과 풍수지리를 연결시켰으니 새로운 역사극이라 볼 수 있다. <협상> 역시 지금껏 협상가를 내세워 그 과정을 전면화한 작품이 없었으니 새로운 게 맞긴 하다.

 

문제는 그 겉모습, 장르적 관습이나 에피소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들 즉 메시지에 있다. 이를테면, 장르로 즐기는 대중 영화라면 사필귀정, 일벌백계의 결말로 꼭 가야 하는 것일까? 눈에 보이는 범죄 뒤에 권력의 구조적 부패가 있다는 식의 전개나 그러므로 정의의 이름으로 너를 용서하지 않겠다와 같은 결말로 수렴되어야 하느냐란 말이다.

 

<물괴>에는 왕을 흔들려는 대신들이 등장하고, <명당>에는 자신들의 권세로 왕권을 더욱 짓밟는 장동 김씨 집안이 등장한다. <협상>에도 온갖 협잡을 일삼는 정부 고위 관료들이 잔뜩 등장한다. 그러니까 이야기의 시작 부분에서 <물괴>는 괴물과 싸우고, <명당>은 집안의 원수와 싸우며 <협상>은 인질범과 대립하지만 이 작품 모두 마지막에 가서는 구조적으로 깊이 뿌리박혀 있는 적폐와 싸운다. 하나같이 적폐청산을 시원한 카타르시스적 결말로 제시하고자 한다.

 

영웅이 우주를 구하는 게 할리우드 대중 영화의 문법이라면 소시민이 적폐를 청산하는 게 바로 한국 영화의 판타지이다. 좋다. 하지만 언제까지 영화적 판타지로만 적폐는 청산되어야 하는 것일까? 아직 적폐를 청산하기는커녕 제대로 시작도 못하고 있는데, 영화는 그런 것은 영화가 해 줄 테니 우선 우리 시원하게 허구적 청산을 즐기자고 권유한다. 아예 불가능할 때엔 그러니까 정권 교체가 있어야만 가능할 때엔 그런 허구적 판타지가 갈증을 달래주는 서사적 정의가 되어 주기에 충분했다. 그때 판타지는 대중의 갈망이었고, 다가올 정의의 촉진제였다. 역사 속에서 찾아낸 작고도 놀라운 승리의 기록들이 대중에게 주었던 감동도 그런 것이었고, <베테랑>의 마지막 장면이 허황되지만 통쾌했던 까닭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이젠, 영화적 승리로 만족할 수도 없고 또 그래서는 안되는 시점에 왔다. 사회적 정의 구현을 현실이 아닌 만화적 판타지로 활용해 싸구려 카타르시스로 제공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아니 이미, 관객들은 만드는 사람보다 훨씬 더 똑똑해서, 청산을 가장한 저속한 거짓말에 속지 않는다. <상류사회>의 변태적 계몽주의가 관객에게 외면받았던 까닭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영화적 허구는 대중이 느끼고는 있지만 아직 인식하지 않은 문제를 풀어낼 때 판타지로서 효력을 가질 수 있다. 이젠 허구가 아닌 현실에서 정의를 구현해야 할 시점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구적 해결에 만족하자는 제안은 안일한 상업주의에 불과하다. 가짜 승리의 거짓 환희보다는 진짜 패배의 모욕감을 돌아보는 게 훨씬 더 성숙한 일이다. 패배의 오욕을 견딜 수 있어야 승리도 지킬 수 있다. 가짜 성취를 판매하는, 한국형 대중 영화의 판타지가 어느 새 한국 영화의 적폐가 되어가고 있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