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역류가 불가능한 ‘상류사회’

상류사회: 사회적 지위나 생활수준이 높은 사람들의 사회. 상류사회는 매우 모호한 말이다. 크다, 예쁘다와 같은 말들이 대표적인데, 도대체 얼마만큼 커야 큰 것이고 어떻게 생겨야 예쁜 것인지 명확한 기준이 없다. 대체로 그 말을 쓰는 사람들의 합의로 통용되는데, 상류사회 역시 마찬가지이다. 상류는 무엇을, 어디까지를 가리키는 것일까?

 

상류라는 말에는 이미 위계가 자리 잡고 있다. 상류가 있으면 하류가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상류사회란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표준적 위계이기에 시대와 장소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가령, 최근 방영되고 있는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여주인공인 고애신은 명망 높은 사대부 가문의 딸로 저잣거리의 누구든 알아보는 상류계층 ‘애기씨’로 살아간다. 반면 그녀의 약혼자인 김희성은 한성 최고의 부자임에도 불구하고 명망 높은 가문의 반열엔 끼지 못한다. 심지어 포수인 승구는 고애신의 스승이지만 하대하는 것은 당시로선 강상죄에 준하는 불법이다. 2018년 영화 <상류사회>에서 ‘상류사회’는 철저하게 ‘돈’으로 나뉜다. <상류사회> 속 상류사회는 재벌기업과 국회의원의 세계로 압축된다. 돈과 권력, 이 두 가지가 바로 변혁 감독이 생각하는 현재적 위계질서의 근간으로 보인다.

 

영화 <상류사회> 메인 포스터

 

사대부 가문, 공작, 백작처럼 타고난 사회적 지위들은 이름 앞에 붙여둠으로써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는 데 쓰이곤 했다. 작위가 있으면 상류, 없으면 하류, 이런 식으로 나누기 간편했던 것이다. 문제는 소위 상류계층의 사람들은 이러한 사회적 표준이나 관습이 지속되기를 원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차이점을 강조하고, 격차를 각인시키고자 한다. <미스터 션샤인>에서 노비됨이나 백정됨을 강조하는 양반들이 그렇고 <상류사회>에서 “우리는 너희와 달라”라면서 갑질을 하는 재벌가 내외가 그렇다.

 

중요한 것은 예술이란, 아니 적어도 이야기는 이런 상류사회를 전시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전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전복은 돈과 권력으로 결코 가질 수 없는 덕과 선을 제시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이 세상을 관찰할 줄 아는 균형 잡힌 시선과 태도가 바로 예술가의 이야기인 셈이다. 예술가가 성자나 도덕군자여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남다른 관찰력으로 드러나지 않는 숨겨진 면모들을 밝히고, 삐딱한 거리감으로 통념을 흔드는 것에 더 가깝다.

 

영화 <상류사회>의 실패는 바로 여기서 빚어진다. 영화는 상류사회의 민낯을 보여준다고 말했지만 그들의 기괴함을 전시하는 데만 열중한다. 여기엔 감독의 관점이 없다. 영화는 급조한 설교로 관객들을 도덕적으로 계몽하고자 한다. 심지어 상류를 꿈꾸는 사람이든 상류에 머무는 최고 권력층이든 모두 성욕의 노예라는 식의 일반화도 감행한다. 상류든 중류든 하류든 성욕에 시달리는 것은 매한가지라는 식의 위험한 동일시를 시도하는 것이다.

 

예술가가 도덕과 선을 가르칠 수는 없다. 가르쳐서도 안된다. 하지만 우리가 세속적 기준으로 무시하는 인물들의 진정한 아름다움과 덕을 보여줄 필요는 있다. 세상이 부와 권력, 명성의 렌즈만으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한다면 예술가는 다른 렌즈로 사람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영화에 요구하는 것은 훔쳐보기가 아니라 그 다른 관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그 어느 시기보다 계층이나 계급, 사회적 지위에 민감한 시대를 살고 있다. 고애신이 살던 조선말기 무려 500여년 지켜져 왔던 위계질서가 고통의 근대사 속에서 한꺼번에 무너졌다. 한국전쟁 이후 우리는 유례없던 능력주의의 시대를 경험했다. 지성과 체력, 용기와 운을 갖춘 창의적 인물들이 새로운 상류계층을 형성할 수 있었던 시기를 누렸던 것이다. 적어도 그때엔 공부만 잘해서 판사, 검사, 의사가 되고 그러면 집안도 나아지고, 살림살이도 나아질 것이라 믿었다. 대학만 졸업하면 살아갈 만한 직장을 구할 수 있으리라 짐작했다. 자기계발과 능력이 통하기도 했던 시절인 셈이다.

 

물론, 능력주의 시대는 만만치 않은 멀미와 현기증을 선사했다. 스탕달의 <적과 흑>이나,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와 같은 훌륭한 대작들은 이러한 순간들을 놓치지 않았다. 더 나은 계층에 오르고자 하는 역류의 고통과 세속적 세상의 갈등을 그려냄으로써 이 작품들은 진정한 가치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해 주었다. 서정인, 최인훈, 김승옥이 그려냈던 세상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제 능력주의의 시대는 끝났다. 한때 우린 계층의 역류를 꿈꾸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노라며 다짐하기도 했지만, 어느새 역류는 불가능해지고 말았다. <상류사회>에서처럼 이젠 변호사도 대기업 사모님의 발을 주물러야 하며, 의사도 <라이프>처럼 대기업 상속자의 구미를 맞춘다. 적어도 더 나은 삶이라고 믿었던 약간의 성장이 달라진 돈과 권력의 위계질서 안에서 별것 아닌 게 된 셈이다. 지위, 재산, 권리, 상속받을 수 있는 재산에 따라 상류사회가 나뉜다면 이건 아예 접근이 불가능한 것이다. 3대를 넘어 세습되고 축적된 부는 견고한 울타리 너머에 있다.

 

그러므로 예술가라면 더욱 이 조악한 세상의 위계를 의심해야 하고 다른 제안들을 해야만 한다. 제인 오스틴이 당시의 갑들을 감싸는 듯하지만 결국 그들의 위선이나 불안을 뛰어넘는 비천하지만 도덕적 인물을 제시하는 데 성공했듯이, 우리는 이 시대의 새로운 기준을 발견해야만 한다. 탐욕이나 욕망보다 더 소중한 가치. 정말이지 그런 가치를 질문하는 문제적 인물이 필요한 시대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