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자유주의자들의 귀환을 기다리며

김지운 감독은 영화 <인랑>에 대한 인터뷰 중 이런 말을 했다. “어쩌면 자유주의자들이 가장 대접을 못 받는 시대”라고 말이다. 김지운 감독은 SNS와 같은 개인 미디어에 ‘개인’의 말보다는 당위의 말들, 해야 할 말들이 더 많은 사태를 두고 이런 말을 했다. “그런 말을 할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이 그런 말을 했다”라며 조금 얼버무렸지만 여기에 함축된 “그런”이 무엇인지는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영화<인랑>의 한 장면.

 

지난 몇 년의 영화계를 보면 김지운 감독의 말이 틀리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택시 운전사> <1987> <강철비> <밀정> 등등의 작품을 보자면, 대개 이념과 역사 같은 큰 주제를 다룬 작품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여기엔 ‘자유주의자’가 끼어들 틈이 없다. 조국의 해방을 논하고, 민주주의를 갈급하는 상황에서 개인, 자유라니. 이건 너무 소아적이며 이기적인 단어로 간추려지고 추방될 수밖에 없었다.

 

하긴 지난 몇 년이 그랬다. 개인을 내세우기엔 지나치게 세상이 엄혹했고, 자유라는 말은 엉터리 보수에 의해 더럽게 오염되었다. 그래서, ‘나’보다는 ‘우리’에 주장을 실었고, 일탈보다는 노선을 택했다. 1990년대 이후 문학과 영화에 르네상스를 가져왔던 수많은 개인들이 모습을 바꾸고 목소리를 달리했다. 모더니스트, 염세주의자, 탐미주의자는 이러한 변화 속에서 자신을 감추거나 스스로 달라졌다. 어쨌거나 수많은 개인주의자들, 자유주의자들이 숨거나 사라졌던 것이다.

 

김지운 감독이 자유주의자들의 대접을 논했다는 건 그런 의미에서 상징적이다. 김지운 감독의 영화들, 이를테면 <컴잉아웃>이나 <달콤한 인생>과 같은 영화는 자유주의자가 아니라면 탄생하지 못했을 이야기들이니까. 여고생의 성적 정체성 찾기를 에로틱하게 녹여 낸 <컴잉아웃>의 정념도, <달콤한 인생>의 모욕감이나 마음이라는 모호한 감성도, 집단이나 단체의 이념으로는 결코 설명하거나 납득할 수 없는, 아이러니한 개인의 비밀 지대다. 공개적으로 드러내긴 어렵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인간의 모순, 그런 게 문제를 일으키는 공간이 바로 개인이니 말이다.

 

2018년 여름 성수기를 두고 개봉하는 영화들을 보면, 어쩌면 이 이념의 시대가 이제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어야 할 때가 된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김지운 감독의 <인랑>과 윤종빈 감독의 <공작>은 모두 남북관계를 소재로 만든 작품이다. 가장 큰 차이가 있다면, <인랑>이 가까운 미래, 남북관계가 호전된 통일 직전을 다루고 있다면 <공작>은 역사상 처음으로 야당 출신 대통령을 갖게 된 그래서 실제로 남북관계가 호전되기 직전인 1997년 무렵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영화들의 공통점이라면 말했다시피 남북관계가 좋아지는 시기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관계 호전이 영화적 갈등의 씨앗으로 제시된다. 남북관계 호전, 통일과 같은 역사적 변화를 대개의 사람들은 반기지만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 누군가는 남과 북의 갈등과 분단 상태가 영원하기를 바란다. <인랑>에선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이 그렇고, <강철비>에서는 북한의 강경파들이 그러하며 <공작>에서는 이권에 눈이 먼 정치 모리배들이 갈등의 지속을 원한다. 통일과 화해 분위기를 거절하는 이러한 자들은 영화적 악의 축이 되어 그것을 갈망하는 주인공과 대결한다. 영화적 허구로나 가능한 화해무드, 이 가설 아래서 영화적 이야기가 설계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이미 지난 4월 남과 북의 정상이 손을 맞잡고 군사 분계선을 넘나드는 장면을 목격했다는 사실이다. <인랑>을 보면서, 남북 화해 무드가 우리, 남한에 엄청난 혼란을 가져왔다는 설정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미 판문점에서의 정상회담과 선언이 있은 후, 심지어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이 만난 이후 마주치는 영화적 설정이라는 게 어쩐지 영 실감이 떨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영화 속에서 아직 경험하지 못한 일들, 간절히 바라는 일들이 실현되기를 바란다. 시각적으로 완벽하게 재현된 이미지들이 우리의 판타지를 실현하고, 욕망을 해소해주는 것이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시점을 영화로 엿보는 것이다. 적어도 영화는 완전한 시각적 착각을 불러일으켜 주니 말이다.

 

물론 누구도 짐작하지 못하는 사이, 급속도로 전개된 회담이었고, 화해무드였기는 했지만, 우리는 TV를 통해 상상과 허구를 앞지르는 현실을 이미 목격했다. 설마 싶어 영화로 상상했던 일이 사실이 되고, 배우가 연기했던 장면을 실제 남북 정상이 TV 카메라 앞에서 실연했다. 성큼 역사가 큰 걸음을 내디디고, 환상보다 먼저 현실이 다가왔다. 늘 외계인이 공격했던 월드 트레이드 센터를 실제 비행기가 공격하는 것을 본 체험과 정반대의 의미로 놀랍고,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상상만 했던 일이 실제로 일어났으니 말이다. 

 

한동안 긴장된 남북관계나 악의 축 김정은, 북한 핵 등은 영화에서 중요한 소재로 환영받았다. 이 갈등을 소재로 한 수많은 시나리오가 영화계에 흡수된 것도 이러한 긴장의 여파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언제나 그렇듯 현실은 허구보다 세다. 아직은 많은 사람들이 이념과 정치, 올바름과 정의와 같은 큰 단어들에 집중하고 있다. 세상엔 여전히 실현되어야 할 정의들이 남아 있다.

 

하지만 어쩌면 김지운 감독의 말처럼 이제 다시 자유주의자들의 꿈을 들여다볼 때가 아닌가 싶다. 큰 단어들이 놓칠 수밖에 없는 미묘하고도 섬세한 개인의 감정, 이야기, 분노, 고통, 행복, 기쁨, 그런 것들 말이다. 작은 감정의 그물망으로 놓치지 말아야 하는 작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이야기들, 자유주의자들이 다시 돌아온다면 그런 이야기들을 다시 돌려줘야 할 것이다. 대열에서 낙오된 혹은 이탈한 영혼에 대한 이야기들 말이다. 다시, 자유주의자들의 섬세한 감성이 조심히 펴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