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거래를 트는 식사, 정을 나누는 밥상

“밥은 먹고 다니냐?” 유력한 용의자를 앞에 두고서도 놓아주어야만 하는 시골 경찰이 그에게 묻는다. 살인도 일이랍시고, 그렇게 열심히 하고 다니는데, 그래 밥은 먹고 다니냐, 라고 말이다. “라면 먹고 갈래요?” 좀 더 시간을 나누고 싶은 여자가 데이트 상대인 남자에게 들어오라는 말 대신, 라면 먹고 가라고 제안한다. 여기서 밥과 라면은 사전에 등재되어 있는 그 의미가 아닐 것이다. 여기엔 사전에 없는 다양한 맥락과 행간의 함의가 담겨 있다.

 

영화 <공작>의 한 장면.

 

유독 한국 영화와 소설에는 밥을 먹자고 제안하거나 식사를 함께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때로는 꽤나 진지하게 다뤄지는데, 하재영 소설 <같이 밥 먹을래요>, 윤고은 소설 <일인용 식탁>은 혼자 밥먹기의 곤란함과 어려움을 주제로 삼고 있다. 드라마 <식샤를 합시다> 역시 그런 측면에서 밥먹기를 주제로 한 이야기다. 먹방 예능, 인터넷 1인 방송까지 따지자면 정말이지 먹는 것을 소재로 한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그런데, 최근 한국 영화에서 밥 먹는 장면은 삶과 정치 사이 애매한 경계의 긴장을 보여줄 때가 많다. 영화 <독전> <공작>만 해도 그렇다. <독전>의 그 유명한 장면, 마약상으로 위장한 경찰이 아시아 마약시장의 거물 진하림(김주혁)을 만나는 장면을 보자. 거래 성사를 위해 원호(조진웅)는 상대방이 먹는 것들을 따라 먹으며 호감과 신뢰를 얻고자 한다. 상대방은 독주에 곁들여 사람 눈알까지 씹어 먹으며 위세를 부린다. 여기서 신뢰는 상대가 먹는 것을 나도 먹는 식의 원시적 방법으로 확보된다. 이들의 식탁은 음식이 놓여 있을 뿐 목숨을 건 전장과 다를 바 없다.

 

사실 우리가 “같이 식사 할래요?”라고 묻는 것은 단순히 밥을 나눠 먹는 게 아니다. ‘밥’은 사회생활의 일부다. 회사 점심시간도 업무의 일부이며 회식 자리는 말할 것도 없다. 누군가와 관계를 새롭게 맺거나 거래를 트고 싶을 때, 밥을 먹자는 제안으로 뻔히 보이는 속내를 포장하곤 한다. 제안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그게 단순히 밥먹자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지만 말이다.

 

영화 <공작>에서 공작원 흑금성이 첫 거래를 성사시키는 곳 역시 중국의 어느 호텔의 조용한 식당이다. 술을 주고받으며 한끼 식사를 나누는 것 같지만 그 식사는 핵, 돈, 목숨이 복잡하게 뒤얽힌 정치적 거래이다. 흑금성은 혹시라도 정신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아버지의 유언까지 대동해 술을 거절하고, 작전용 녹음기를 발목에 숨긴 채 목숨을 건 연기를 한다. 말이 식사 자리이지 뭐 하나라도 먹었다가는 곧바로 체하고 말 듯한 위기 상황과 다르지 않다.

 

눈길을 끄는 것은, 북한 고위 간부와 남한 사업가로 위장한 첫 만남이 브로맨스로 녹는 순간이다. 그 순간에도 똑같이 ‘밥’을 먹는데, 이번엔 북한 간부 이차장의 집에서, 이차장의 아내가 만든 밥을 나눠 먹는다. 녹음도, 계산도, 작전도 없는 이 자리에서 그들은 드디어 밥다운 밥을 먹는다. 이러한 장면은 영화 <강철비>에서도 연출되는데, 청와대 비서관과 북한 군인이 잔치국수를 나눠 먹는 장면이 그렇다. 적과의 동침보다 어려운 게 적과의 한끼라도 되는 듯, 그렇게 한끼를 나눠 먹고 난 이후 그들은 적이 아닌 동지로 서로를 믿게 된다. 거래를 트는 게 아니라 마음을 여는 것이다.

 

이러한 식사의 행간은 올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영화 <어느 가족>에 명백히 그려져 있다. <어느 가족>의 원제목은 <만비키 가족>인데, 만비키는 일종의 좀도둑질 내지는 좀도둑을 의미한다. 이 가족은 애초에 범죄로 형성되었다. 할머니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들을 가족으로 삼고, 부모 역할의 두 남녀는 길거리에 유기된 아이들을 데려온다. 영화의 거의 마지막 부분, 아이들과 할머니를 유괴하고 납치한 혐의로 수사를 받는 젊은 여성은 “남이 버린 것을 주워 온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그 가족 자체도 남의 것을 주워서 이뤄진 셈이다. 법의 관점에서 보자면 범죄지만 좀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법이 놓치는 사람의 할 일을 그녀가 해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만약 그렇게 줍지 않았다면 노인은 고독사했을 테고, 아이들은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게 뻔하다.

 

이 다른 관점이 설득되는 지점이 바로 영화 내내 반복되는 밥 먹는 장면들이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가족들은 추운 길거리를 헤매던 다섯 살 소녀와 뜨거운 고로케를 나눠 먹는다. 가족들이 모여 있는 장면 내내 그들은 무엇인가를 먹고 있다. 특별히 ‘우리 밥 먹자’라고 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 먹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들도 그걸 자연스럽게 나눠 먹는다. 여름엔 소면을, 겨울엔 고로케를 먹는 게 다를 뿐, 그렇게 식탁에 옹기종기 모여 밥을 나눠 먹는 것이다.

 

문제는 정을 나누는 식사 장면이 한국 사회를 묘사하는 장면에서 매우 드물어졌다는 사실이다. 언제부터인가 밥 먹는 장면은 정보다는 이익을 도모하고, 거래와 협잡을 공유하는 기회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내부자들>의 그 유명한, 나체 식사 장면도 그럴 것이다. 서로를 믿지 못해 발가벗어야만 술과 음식을 나눌 수 있다면 그건 이미 ‘인간’의 식사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과거 향수 속에서, 이방의 식탁에서 따뜻한 밥 한끼를 목격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만큼 각박한 현실을 살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정말이지, 따뜻한 밥 한끼만을 위한, 목적 없이 안부를 전하기 위한 그런 식사의 온도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