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한의 예술산책-깊이보다

예술가들의 앞날 가로막는 것들

마르셀 뒤샹, 자전거 바퀴(1913),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장면.

프랑스 예술가 마르셀 뒤샹은 수천년간 이어온 물질 중심의 미술 의미를 ‘정신’으로 옮긴 장본인이다. 동시대 미술의 기초가 되어준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팝아트, 누보 레알리즘, 미니멀아트, 개념미술에 이르는 미술운동의 탄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그를 빼놓고는 현대미술을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만약 뒤샹이 없었다면 미술의 양상도 지금하고는 달랐을 것이다.

 

혁신적이며 실험적인 태도는 뒤샹이 남긴 가장 큰 족적으로 꼽힌다. 그로 인해 예술가들은 독창성·고유성을 획득할 수 있었고, 예술의 발전과 사회의 진화를 매개하는 위치에 설 수 있게 되었다. 표현 영역의 무한 확장도 그가 쳐놓은 사유의 그물망 덕분이다.

 

물론 뒤샹 외에도 오랜 시간 되풀이되어 온 집단적 행동 양식을 거부한 채 미술 자체의 존재이유와 방식에 관한 문제 및 대안을 제시한 예술가들은 많다. ‘보는 것에서 아는 것으로의 전환’으로 회화사에 균열을 가한 피카소를 비롯하여 지각적 경험만으론 예술인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할 수 없다고 선언한 앤디 워홀, 비디오아트를 통해 세상을 보는 또 다른 방법을 알려준 백남준 등이다.

 

그런데 작금의 적지 않은 예술가들에게선 기존 체계와 관습적인 예술에 대한 반발이나 특정 경향에 종속되는 흐름에 격렬히 저항하는 모습이 읽히지 않는다. 금과옥조로 삼아야 할 창의성·독창성·시대정신 또한 발견하기 어려울뿐더러, 낡은 것을 전복시키며 전통적인 창조의 개념 자체를 해체해 새로운 현재성을 증명해야 할 의무도 쉽게 엿볼 수 없다.

 

대신 질투와 원한의 전형적 산물인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이름 아래 자신의 초라함을 합리화하는 작품들을 끝없이 만들어낸다. 전시장 바닥에 잡다한 사물을 이리저리 늘어놓곤 철학적인 척하는 난삽한 작품이 범람하고 서구 예술가들인 피터 도이그나 마를린 뒤마, 데이비드 호크니, 네오 라우흐의 아류가 판을 친다.

 

여기에 공감 불능의 사변적 이야기에 멈춰 버린 작품들, 취향공동체에 읍소하며 그들이 하사하는 경제적 교환가치에 자리를 내준 작업들 역시 드물지 않다. 이는 대개 논리는 실체를 갈구하나 실체는 논리를 증명하지 못하는 것들이다.

 

궁극적으로 한국 미술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이런 현상엔 여러 원인이 있다. 전위의 희박함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예술가들의 무딘 사고, 실력만으론 접근할 수 없는 카르텔, 그리고 미술의 가치에 반함을 알면서도 당장의 상업적 이익을 추구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창작환경 등이다.

 

그중에서도 예술가들을 보호·육성하기보다는 소비에 급급한 시장경제 시스템 내에서 자본주의의 천박함과 예술의 자율성 거래에 앞장서는 관치행사들, 현실에서 동떨어진 행정 중심의 예술정책이야말로 미술 강국 도래를 저해하고 예술가들의 앞날을 가로막는 진짜 요인이다. 이것들이 소멸되지 않는 한 우리 미술은 희망이 없다.


홍경한 미술평론가 전시기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