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옛날 냉면집에 갔다

옛날 냉면집에는 종이로 술을 만들어 매달았다고 하는데, 그 종이술이 국숫발을 의미한다고 했다. 직관적 광고물로 그만한 게 없지 싶다. 


내가 기억하는 냉면집은 빨간색 바탕색에 흰 글씨로 ‘냉면 개시’라고 써 붙였다. 임시로 판다는 뜻이었다. 찌개 팔고 탕 끓이는 집은 여름에 손님이 줄어드는 법이라 한철 메뉴로 냉면을 추가했던 것이다. 그다지 품질 좋은 냉면이었을 리가 없다. 메밀을 쓴 냉면이라면 기계도 있어야 하고, 그걸 솜씨 있게 다루는 발대꾼이며 기술자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공장에서 만든 면을 풀어서 그럭저럭 만든 육수에 얼음 깨어 넣고 제공했다. 이 계절에 흔한 수박이며 토마토가 올라가기도 했다. 서울식 임시 계절 냉면으로 뇌리에 남아 있는데, 뜻밖에도 그런 냉면을 서울 밖의 냉면집에서 만나기도 했다. 



옌볜에는 ‘연변냉면’(동포들은 한자어를 보통 우리식 발음으로 부른다. 지린이 아니라 길림, 헤이룽장이 아니라 흑룡강이다)이 있는데, 수박이 보통 올라간다. 일본에 살던 교포가 만든 냉면은 ‘모리오카 냉면’이다. 일본 북동쪽의 작은 도시인데, 이곳에 냉면집이 많다. 고명에 토마토나 수박을 올리는 경우가 흔하다. 서울 정통 평양식 냉면집에서는 쓰지 않는 고명이다. 도대체 왜 그런 차이가 생겼을까. 궁금하기만 하다. 


예전 서울에는 냉면집의 부침이 심했다. 그 경쟁을 견디고 살아남은 집들이 바로 우리가 여름이면 리스트를 챙기는 그런 곳이다. 시장에는 겨울엔 칼국수며 잔치국수를 팔고, 여름엔 냉면을 파는 집들이 꽤 있었다. 여름에는 미어터져나갔다. 정통 냉면집 절반 정도의 가격이었다. 국수 뽑는 기계가 없으니, 직원이 연신 공장 냉면을 한 올씩 뜯어내는 수고를 하는 장면도 기억난다. 그냥 ‘나이롱 냉면’이라고도 불렀다. 속칭 툭툭 끊어지는 메밀면이 아니고 질기기 그지없는 터라 그런 별명을 얻었다. 씹고 또 씹다가 냉면에 친 겨자와 매운 양념이 독해서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씹어 삼키던 냉면집에 사람이 드물어지고, 칼국수 주문이 많아지는 건 여름이 끝나간다는 뜻이었다. 


하얀 모시옷을 받쳐 입고 냉면을 후루룩 드시던 그 시절의 노인 손님들에게서는 안방 장판 냄새가 났다. 정겨운 시골방, 할머니, 할아버지가 품에 안아주실 때 나던 그 살냄새. 그때 그냥 실향민이라고 부르는 그런 노인들. 요즘 냉면집에 오시는 노인들은 실향민이 거의 없다. 그 숫자가 점점 줄어드는 까닭이다. 1952년을 마지막 기점으로 삼아 계산해보면, 그때 스무 살의 청년이 살아 계시면 구순이 머지않았으니. 


올해 냉면집 경기는 좀 그렇다고 한다. 작년보다 폭염이 적었고, 이른바 평양냉면 신드롬도 한풀 꺾였다. 게다가 신흥 냉면집도 서울에만 수십곳이 더 생겼다. 그래도 나는 작열하는 이 여름 마지막, 진땀을 흘리며 서울 옛 동네의 냉면집에 들어선다. 모시적삼 입은 노인들을 혹시나 볼 수 있을까 싶어서. 빳빳하게 풀 먹여 다려 입으신 그 노인들은 아직 살아계실까.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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