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단것 권하는 사회


어렸을 때 박찬호 야구를 보는데 흑인 선수들이 많이 등장했다. 미국 국적 흑인이야 이미 우리가 어느 정도 그 역사를 아는 부분이다. 소설 <엉클톰스캐빈>이 그랬다. 메이저리그에 미국인이 아닌 중남미 국적의 흑인 선수가 많아서 좀 놀랐다. 아니, 왜 저들은 검은 피부일까.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거나 건너뛰었던 고통의 역사가 거기 있었다. 약탈적인 설탕 산업이 중남미 흑인들의 먼 조상을 잉태했었다는 사실 말이다. 


설탕이 얼마나 돈이 되고 귀한 산업이었으면 유럽 여러 나라가 혈안이 되어 노예사냥과 생산지 개척에 나섰을까. 아시아라고 다르지 않았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설탕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애를 썼다. 오키나와는 본토 일본인들이 귀중한 설탕 공급지로 써먹었다. 강제 공출과 착취의 역사가 얼룩져 있다. 물론 여기에는 태평양전쟁 시기 참혹한 옥쇄작전에 민간인을 동원하고 이후 미군부대 주둔과 관련한 일본 정부의 태도도 더해진다. 


1452년, 단종 즉위년 실록에 인상적인 기록이 한 줄 실려 있다. 명나라 사신이 선물로 설탕 한 상자를 바쳤다는 것이다. 중국은 이미 남방에서 설탕 생산이 활발해서 소비량이 상당했다. 조선은 오랫동안 설탕이 귀했다. 주로 맥아당과 꿀이 단것의 핵심이었다. 중국과 일본이 조선과 주요 교역품으로 설탕을 들고 온 것은 당연했다. 고종시대 무렵에 커피를 도입한 것으로 역사는 쓰고 있는데, 어쩌면 커피 자체보다 당시 선망의 대상이었던 각설탕을 넣어 마시는 재미가 더 좋아서였던 것 아닐까 싶다. 요즘은 블랙커피가 유행하고 있지만, 한국 커피 역사의 대부분은 설탕과 같이 발전해왔다. 믹스커피가 대유행했던 것도 결국은 달달한 단맛이 디저트를 대용할 수 있었기 때문일 테니까. 


현대 식품은 기실 설탕에 많이 의존한다. 단맛은 누구나 좋아한다. 한식조리사 실기시험의 공식 ‘배합표’에는 설탕이 대부분 들어간다. ‘간장 하나, 설탕 하나, 고춧가루 하나’ 하는 식이다. 가공식품도 설탕의 도움 없이 만들기 어렵다. 보존성도 높이고, 감촉도 맛도 좋게 해준다. 일단 가공했다 하면 설탕을 기본으로 깔고 간다고 봐도 된다. 편의점 도시락에 설탕이 빠지면 밋밋해서 먹기 어렵다. 백반집 김치에도 흔히 설탕이 들어간다. 볶음과 조림에도 설탕이 꽤 많이 들어간다. 보이지 않게 우리는 설탕을 먹는다. 다만 아직 위험 수위까지 도달하지는 않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다른 나라에 비해 섭취량이 높지 않다는 통계를 기초로 한다. 한국은 여전히 장을 봐서 천연 상태의 재료로 집에서 밥을 지어먹는 나라다. 가공식품 비중이 높지 않다. 지나치게 설탕을 경계할 필요는 없다. 밥에서 섭취하는 당도 결국은 설탕과 별 차이 없는 당이다. 과당 등을 포함하여 일반적인 당 섭취량의 총량을 이해하는 게 더 중요하다. 우리가 식품과학을 공부해야 하는 까닭이다. 알고는 먹자는 생각이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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