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김용균이라는 빛


내가 살던 서울 변두리는 작은 공장이 많았다. 지방에서 올라온 젊은 남녀들이 직공으로 일을 다녔다. 아마도 12시간 맞교대 일을 마친 그들이 삼양라면이나 롯데소고기라면 덕용포장을 사들고 퇴근하는 걸, 나는 골목에서 구슬치기를 하다가 보곤 했다. 언젠가 엄마가 “장도 못 담가 먹을 텐데 어떻게 간은 맞추는지 몰라”하고 혼잣말처럼 하시는 걸 들었다. 


가난해도 집마다 장독이 있던 시절, 자취하는 노동자 청년들이 뭘로 간을 냈을까. 샘표에 별표, 닭표니 하는 서울의 공장 제품을 썼을까. 어쩌면 설이나 추석에 집에 가서 장 같은 건 가져왔을 것이다. 상하는 것도 아니고, 한번 가져오면 오래 먹을 수 있었을 테니. 그런 명절 무렵에는 동네 전봇대마다 광고 전단이 붙었다. 대절 버스 광고였다. 기억하건대, 그 버스들의 행선지는 대개 호남이었다. 임실-순창-진안-전주…. 곡성-화순-광주-해남-목포…. 비슷한 지역을 묶어서 버스는 떠났다. 선글라스에 흰 장갑을 낀 기사님이 모는 버스였다. 미어터지는 고속도로나 고만고만한 국도에 시달리며 보통 10시간이 넘는 고행길을 갔으리라. 그래도 그 형들의 표정은 밝았다.  


그들의 부엌을 구경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동네 형이나 누나로 같이 살아서 친했다. 물론 그들도 결혼하여 곧 이 도시 변두리의 3류 시민이 될 것이니까. 그들의 이름도 우리는 잘 몰랐다. 수십개의 벌집 같은 방을 번호로 붙여놨고, 자연히 그들도 ‘○○호 형’이 되었다. 멀리서 보면 “○○호 형!”하고 불렀다. 그 당시 유행한 감방 소설에서 그러듯이. 이름 대신 호실로 불리던 형들, 누나들. 지금은 어디서 장사라도 해서 먹고살고 있을까. 그 동네를 떠서 번듯하게 살고 있을까. 소고기국도 마음껏 끓여 먹고 있을까. 


그들의 방은 벌집방, 쪽방이었다. 피아노만 한 방 하나에 쪼그리고 라면이나 끓이면 딱 맞는 크기의 부엌이 붙어 있었다. 까치발을 붙여 올린 합판 선반에는 냄비며 플라스틱 바가지가 놓여 있었고, 석유 됫병과 분홍색 풍로 하나가 부엌살림의 중심이었다. 거기에 라면도 끓이고 고향에서 가져온 신 김치로 찌개도 끓였다. 그 시절에는 왜 그리도 된장은 많이 끓였던지. 동네 ‘근대화연쇄점’에서는 늘 두부와 콩나물이 매진이었다. 집집마다 그걸 된장에 넣고 끓여댔다. 형들도 누나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된장 말고 뭔가 변변한 찌개를 끓일 재료를 살 돈이 없었을 것이다. 동네 정육점에서 제일 잘 팔리는 게 돼지비계이던 시절이었다. 


며칠 전에 ‘김용균이라는 빛’ 행사가 있었다. 거기 김훈 소설가가 앉아서 써온 글을 읽었다. 그이 특유의 건조한 문장들이 나를 때렸다. ‘산업 전사’ 김용균들은 내가 어렸을 때도 있었고, 지금도 있다. 라면이 그들을 위로하는 것도 변하지 않았다. 김훈이 썼던 글이 떠올랐다. 오천원짜리 노동자의 밥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란다는, 허술하지만 땀내 나는 이들을 위로하는 밥집의 이야기였다. 김용균들이 먹는 그런 밥이다. 김용균과 옛 형과 누나들이 생각났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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