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노포의 조리기구


예전에 오래된 한 식당에 들른 적이 있다. 주방을 기웃거리는데, 칼이 좀 특이했다. 주방장이 비슷한 모양의 칼 두 자루를 번갈아 쓰는 게 아닌가. 자세히 보니 크기가 달랐다. 하나는 크고 하나는 모양은 비슷하지만 아주 작았다. 


“칼이 비슷한 식도인데 크기가 왜 그리 다릅니까. 용도가 다른 건가요?”


주방장이 멋쩍게 웃더니 대답했다. 


“아, 이거요? 같은 칼인데 작은 칼은 워낙 오래 쓰다 보니 그리되었다오. 한 사십년 썼나.”


갈아서 쓰고 또 갈아 쓰다 보니 그리되었다는 것이었다. 원래 커다란 식도였던 칼이 닳고 닳아서 과도처럼 작아져버렸다. 그는 그것이 안쓰러운지 버리지 못하고 다른 용도를 찾아서 쓸모를 주었다. 무려 사십년 된 칼이니, 무생물이긴 해도 무슨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해도 믿어질 것 같은. 


다른 식당에서 있었던 일. 열심히 요리하는 주방장의 나무도마가 특별해 보였다. 얼마나 칼질을 했는지 가운데가 움푹 패어 있었다. 민속박물관 소장감이라고 했더니 내 손을 잡아끌고 부엌 구석으로 가는 게 아닌가. 그처럼 가운데가 심하게 파여 쓸모를 잃은 도마가 열 장이 넘게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이미 녀석들은 퇴역한 도마지만 마치 주방장의 친구들처럼 한데 모여서 살아가고 있었달까. 이봐, 주방장. 당신 너무 오래 일했어. 이제 그만하고 우리처럼 쉬라고. 


“동고동락하던 놈들이라 버릴 수가 있어야지. 그냥 모아두었는데, 내가 그만두면 누군가 버릴까 싶어 그만두지도 못한다오.”


그 주방장은 몇 해 전인가 그만두었고, 가게도 사라져버렸다. 창업 사십년이 넘은 가게였다. 


해장국을 잘하는 집이 있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곳이다. 대를 이어간다. 선친의 유언이 이랬다. 


“나 죽어 장사 지내도 솥의 불을 끄지 마라. 손님들이 왔다가 문 닫았으면 얼마나 섭섭해하시겠나.”


유언을 지켜 불을 피우고 국을 끓였다. 장사도 여전히 번성했다. 이 집은 오래된 솥을 새로 갈 때가 있다. 너무 오래 끓이고, 바닥을 싹싹 닦다 보면 두꺼운 무쇠솥도 얇게 닳아져서 구멍이 난다는 것이었다. 


쇠말뚝을 갈아서 바늘을 만드는 이들이 식당에 여전히 있다. 그들이 먹이는 일을 지속하는 건 생계의 수단이겠지만, 어렴풋이 의무감이 있어서 하는 일이기도 하다. 누군가 해야 할 일, 하루도 불을 끄지 않겠다는 마음. 엄혹한 노동을 숙명처럼 이어가던 이들. 장인을 우대하자는 건 어느 사회에서나 존재한다. 문제는 그것이 대부분 구호에 그친다는 사실이다. 노포니 백년가게니 우대하고 기념하는 일을 관청에서 하고 있다. 잘하는 일이다. 다만 그 속내까지 다 들여다보고는 있으신지 모르겠다. 닳아버린 칼, 패인 도마와 무쇠솥에 대해 이해하는 마음이 있는지 말이다. 


식당은 철저하게 사적 영업공간이지만, 그것도 오래되면 시민의 자산이 된다. 그런 마음이 두루 깃들면 우리는 그걸 역사라고 부른다. 역사라는 게 신문에 나고 사관이 붓으로 쓰는 일만 이르는 말은 아니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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