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청진옥의 ‘국잽이’

종로의 유명한 해장국집 청진옥에 갔더니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온다. 머릿수건을 쓰고 뚝배기에 해장국을 푸는 젊은 여인의 사진이다. ‘국잽이’라고 부르는 업무를 오랜 시간 해냈던 직원이다. 그렇게 국잽이로서 정년 넘게 일하고 은퇴했다. 다들 셰프며 파티시에며 소믈리에인 지금 요리판에서는 생소한 직책이다. ‘~잽이’는 어떤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이를 말한다. 왕년의 우리 직업판에서는 ‘꾼’이거나 ‘잽이’가 많았다. 근사한 벼슬을 호칭하는 이름은 아니었다. 손으로 평생 무언가를 주물러서 업으로 삼던 낮은 신분의 이들이었다. 요즘도 우리는 무얼 잘하는 이를 두고 꾼이니, 잽이니 한다. 직업의 세계에서는 거의 쓰지 않고, 이제는 입말로만 남아 있는 듯하다.



개화기에 서양인에 의해 근대적인 식당 문화가 이식되기 시작한 후에도 우리 민중의 식당에서는 이런 꾼들이 음식을 만들었다. 냉면집, 국밥집, 빈대떡집에서 일하는 이들을 누구도 요리사라고 부르지 않았다. 제법 규모 있는 식당은 ‘중머리’라는 직책이 있었다. 궂은일을 도맡는 주방의 심부름꾼을 이르는 말이었다. 냉면집에는 발대꾼이 있었고, 누름꾼도 있었다. 대나무 발대로 국수를 휘저어 익히고 잘라내는 노릇, 분틀에 반죽을 넣어 눌러내리는 몫이었다. 국수를 헹궈서 준비하는 이는 앞잽이라고 불렀다. 왕년에 그쪽의 인력시장에서는 제철인 여름이 오기 전에 구인 시장이 굴러가는데, 발대꾼이며 반죽꾼을 찾는 주인들이 바빴다고 한다. 요즘도 전통적인 냉면집이며 국밥집에서는 이런 호칭이 그대로 쓰인다. 명칭은 내용을 규정하곤 한다. 요리사 갑돌이보다 발대꾼 갑돌이가 더 냉면을 잘 삶을 것 같기도 하다. 요리사보다 국잽이가 토렴해주는 해장국이 더 맛있을 것 같다. 물론 전통적인 음식을 만드는 식당 다수도 현대적 편제로 바뀌고 있다. 주방장-부주방장-보조 요리사로 이루어진 구조다.


꾼과 잽이는 좋지만, 찬모와 밥모는 이제 그만 썼으면 한다. 꾼과 잽이란 말에는 그래도 전문 분야의 기술자라는 뉘앙스가 강한 반면, 찬모와 밥모는 영원히 주방의 보조자로 지칭된다. 주방장보다 더 오래 일하고, 찬을 잘 만들어도 그 ‘여자’는 영원히 아무개 찬모다. 찬모란 더구나 조선시대 노비의 일에서 유래한다. 관이나 궁에서 요리 보조를 맡는 여성 노비의 정식 호칭이었다. 제법 큰 규모의 외식회사에서 구인 공고를 내는데, ‘찬모 ○○명 모집’이라고 쓴다. 남자들은 과장, 차장, 부장 달고 셰프님에 조리장까지 하는데 왜 여자 요리사들은 늘 찬모인가. 촘촘한 노동 법률이 존재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봉건시대의 차별적 호칭이 남아 있다는 건 정상이 아니다. 하기야 한국의 노동시장에 대한 어떤 자조에 비추어보면, 호칭이란 것도 별 의미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옛날 노비와 현대 노비의 차이점은 뭘까?”


“다 같이 노비이면서 옛날에는 스스로 노비인 줄 알았으나 요즘은 아닌 줄 안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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