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택시에서 듣는 맛


택시를 타고 가다보면 노인 기사가 많다. ‘노인’이 몇 살부터 부를 수 있는 호칭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내 기준으로는 삼촌뻘이다. 대략 해방 후 6·25 이전 세대들. 그들이 운전대를 잡고 있는 사정을 나는 잘 모른다. 요즘 어떤 모바일 차량 공유 서비스의 광고 문구에 ‘손님에게 말 걸지 않습니다’가 있다. 기사가 이런저런 푸념을 하고 말 거는 게 불편한 손님이 많다는 뜻이다. 나도 그리 편하지 않을 때가 많지만, 때로는 재미있는 얘기를 들을 수 있어서 귀 기울이곤 한다. 


한 사람의 생애는 도서관급이라고도 하고, 시대 역사의 축소판이라고도 한다. 뒷골목 민초들의 생애사는 직접 듣는 것 말고는 알 수 없다. 그런 얘기를 택시기사들에게 듣는 맛이 있다. 그중에서도 거창하지만, 한민족 식생활사라고 부를 수 있는 진술이 꽤 다채롭다. 영등포가 물이 좋은 땅이어서 농사가 잘되었고, 가을걷이 무렵에는 논에서 미꾸라지를 잡아 솥을 걸고 추어탕을 끓였다는 기억은 흥미로웠다. 공장지대와 교통 요지였던 영등포가 물 좋은 농사지역이었다니. 


어떤 기사는 강원도 산골 출신인데, 막국수 얘기가 기가 막혔다. 이맘때 겨울에 햇메밀을 털면 겨우내 귀한 양식이 되었다고 했다. 고춧가루 귀할 때라 ‘넌둥만둥’ 조금 넣고 갓김치를 물 많게 담가 메밀국수를 내려 말아 먹었다는 것이다. 그 시절 마을에 흔한 일이었다니, 개인에 국한된 기억도 아닌 듯하다. 막국수는 늘 평양냉면에 밀려서 소박한 지역음식으로만 남아 있는데, 이런 기억들을 소환하면 독자적인 역사를 구축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지금은 희미해진 청진동 일대 기억을 구술해주는 기사도 있었다. ‘라도(RADO)’ 시계 이상은 되어야 외상으로 맡아주었다는 술집, 외상이 하도 많아서 카운터 서랍에 시계와 주민증, 학생증이 넘쳐났다는 술집, 피맛골을 점심시간에 지나가면 온몸에 구운 생선 연기가 배어 목이 칼칼할 정도로 사람이 넘쳐났다는 기억, 연탄불로 고기를 굽던 때라 마시고 나오면 탄 가스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는 약간 아찔한 술회까지. 1980년대 중후반 데모가 한창일 때 백골단에 쫓겨 학생이 술집에 숨어들면 같이 자리에 앉혀 손님인 양 위장하여 뒤쫓아온 검문을 피할 수 있었다는 얘기를 들을 때는 손에 땀이 났다. 광주항쟁 ‘김밥 아짐’들의 활약에 버금가는 서울판 아재들의 구원활동이 아니었을까도 싶다. 끝내 그들은 1987년에 와이셔츠를 걷어붙이고 거리로 나섰다. 북창동에 화교 중국집이 많던 시절을 기억하는 기사도 만났다. 옛날 청나라 선조들이 입던 복색의 주인이 카운터에 앉아 있던 50년 전 얘기도 들었다. 밝은 갈색의 옛날 짜장면 맛의 회고를 들을 수 있었던 건 노인이 모는 택시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먼저 말 걸지 말기를 요구하는” 이 시대에 말이다. 그 불편한 언행이 추억을 수집하는 어떤 이에게는 다른 성격이 되기도 한다. 


문제는 서로 말을 나누는 방식이다. 훈련받지 못한 택시기사들이 그걸 충족시키지 못해서 생겨나는 불화이긴 하다. 그러니 아예 말을 걸지 말라고 하는 것이겠거니.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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