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정성일의 영화로 세상읽기

이 남자들 왜 불러낸 거야

나는 중얼거렸다. 이 남자들은 미친 게 아닐까? 나는 이 말을 나쁜 의도로 쓴 것이다. <퍼펙트게임>(첫번째 사진)을 본 다음 일주일이 지나 <마이 웨이>(두번째 사진)를 보았다. 나는 의도적으로 영화 제목 앞에 감독의 이름을 쓰지 않았다. 내 관심은 이 남자들이다. 두 편의 영화 속의 세 명, 혹은 네 명의 ‘남자’ 주인공들. 정말 이상하게도 이 두 편의 영화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도 같은 주인공(들)을 불러냈다. 아니, 차라리 서로의 주인공을 바꿔 쳐도 서로 다른 시대에서도 이 ‘남자’들은 동일한 믿음을 갖고 똑같은 행동을 할 것이다. 동시에 도착한 반복. 누가 이들을 불러낸 것일까? 아니, 그보다 먼저. 당신들은 누구십니까?

두 편의 영화. 우선 <퍼펙트게임>. 1987년 5월16일 잠실운동장에서 롯데 최동원(조승우)과 해태 선동열(양동근) 두 투수가 15회까지 가는 4시간54분 내내 승부를 향해서 필사적으로 공을 던진다. 이 이야기는 실화이다. 그 다음 <마이 웨이>. 1938년 경성 마라톤에서 마주친 조선인 준식(장동건)과 일본인 다쓰오(오다기리 조)가 전쟁 한복판에서 만난 다음 노몬한 전쟁터에서 러시아 포로수용소 벌목장을 거쳐 함께 독일군복을 입고 노르망디 해안에서 연합군 상륙을 맞이하게 된다. 이야기는 허구이지만 노르망디 해안에서 독일군복을 입은 한국인이 연합군에게 포로가 된 사진은 실제이다.

출처 ㅣ 경향신문

 

이 두 편의 영화는 스포츠 영화이다. <퍼펙트게임>은 단도직입적으로 스포츠영화이고, <마이 웨이>는 전쟁의 탈을 뒤집어 쓴 스포츠영화이다. 야구와 마라톤. 하지만 내 핵심은 거기에 있지 않다. 두 영화의 기괴한 공통점은 자신의 몸의 가능성에 대해서 황홀하리만큼 스스로 매혹된 남자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자기의 육체를 전시하고 싶어서 어쩔 줄 모른다. 이때 두 영화 모두 남자들은 사실상 몸의 훈련에 홀린 듯이 빠져든다. 최동원과 선동열은 야구 시합에서 9회를 모두 던진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15회를 투수교체 없이 던진)다.

영화는 사실상 이들의 몸을 망쳐버리는 자살에 가까운 행위를 위한 알리바이를 대기 위해서 정신을 내세우기 시작한다. 이때 이 정신은 이미 이성을 잃은 상태이다(<퍼펙트게임>). 준석은 징집을 당한 몽골의 전쟁터 한복판에서도, 눈 내리는 영하의 러시아 벌목장에서 하루 종일 지옥처럼 일하고 난 다음 어둠 속에서도, 그리고 청각을 잃고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는 노르망디 해안가 벙커 앞에서도 달리기 연습을 멈추지 않는다(<마이 웨이>). 이들에게 스포츠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목적과 목표 사이의 무시무시하리만큼 도착적인 자기최면.

만일 이 과정이 이들의 삶을 숭고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설명하면 핵심을 놓치는 것이다. 질문은 이때 이들의 목표는 무엇과 교환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라고 반문하는 것이다. 그들이 더 많이 희생할수록 얻는 무언가는 무엇인가? 육신의 나르시시즘. 거기서 얻은 남성(들만)의 (배타적인) 우정. 이상할 정도로 두 영화에서 여자들은 거의 끼어들 틈을 발견하지 못한다. 단지 남자들의 몸을 바라보면서 황홀한 눈물을 흘리거나(<퍼펙트게임>) 혹은 여자들이 존재하지 않는 장소만을 골라서 이동해간다. 혹은 잠깐 동안 주인공을 도와주기 위해서 등장한 다음(중국 저격수 판빙빙) 죽음을 맞이하고 사라진다(<마이 웨이>). 이때 사실상 이들은 자기 자신을 더욱 단련시키고 그들의 육신을 통해서 정신을 고양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맺는 사회적 관계 안에서 그들의 영웅적 역할을 요구받는 명령의 포로들이다.

출처 ㅣ 경향신문

포로들? 그렇다. 이들은 자기 역할에 대한 어처구니없게도 과잉된 요구에 대해서 오로지 예, 라고 긍정할 줄만 알지 아니오, 라고 저항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것이야말로 자신의 육체에 대한 자발적인 고문이 아니고 다른 무엇이겠는가? 여기서 재빨리 돌아오고 있는 이미지는 지치지 않는 불굴의 투쟁을 하는 근육을 지닌 남성의 육체에 대한 압도적 우위이다. 이 육체가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서 어떤 우회로도 거치지 않고 망설임도 없이 일직선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내 질문은 간단하다.

첫 번째 질문. 자기를 자포자기해버린 주인공의 행위에서 당신은 무엇을 즐기고 계십니까? 내가 끔찍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 두 편의 영화가 코미디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무도 이 우스꽝스러운 행위에 대해서 웃지 못할 것이다. 이 과정에 관한 어떤 반성적 유머도 없이 주인공들이 그들의 행위에 대한 요구에 부응하기 위하여 앞으로 나아가기만 할 때 우리들은 그들의 주변과 함께 이 황당무계한 행위를 둘러싼 정념의 세계에 알리바이를 제공하기 위하여 그들과 동일한 선택을 공유해야 한다. 무슨 선택? 내 육신이 부서져도 상관없어요, 그저 그걸 할 수만 있게 해주세요.

두 번째 질문. 이 남자들은 영웅인가, 광대인가? 이 말의 방점, 남자들. 역사 속의 남자들. 우리들은 그들을 왜 다시 불러냈는가? 우리가 그들에게 미처 치르지 못한 셈의 채무는 무엇인가? 후렴구의 반복. 돌아온 남자들은 영웅인가, 광대인가?

같은 말의 다른 판본. 우리들은 도대체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영화가 대중의 욕망을 직접적으로 반영한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손쉬운 대답이다. 대신 이렇게 반문하고 싶어진다. 왜 이런 이성을 잃은 ‘남자들’이 나와서 스크린 위에서 날뛰도록 내버려 둘 만큼 대중의 방어선이 무너져버렸는가? 생각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있는 것. 이때 전자의 활동이 멈추자 후자가 미쳐 날뛰기 시작한다. 만일 우리 시대가 생각할 수 있는 것에서 멈추자 반대로 대중영화들은 후자를 내세워 그 간극을 메우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시인 예이츠의 충고. 가장 좋은 것은 신념을 결여했고 가장 나쁜 것은 열정으로 충만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