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정성일의 영화로 세상읽기

꿈결 같은 통속성, 희망 없는 아메리카

당신은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 별 이야기도 없으면서 예술영화인 척 허풍을 떠는 영화와 상투적인 이야기에 불과한데도 자기가 예술영화인 줄 아는 영화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면 어느 쪽에 침을 뱉어야 할까. 나는 올해 칸영화제 황금 종려를 받은 테렌스 맬릭의 <트리 오브 라이프>를 본 다음 정확히 한 달이 지난 어제 같은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니컬러스 윈딩 레픈의 <드라이브>(사진)를 보면서 심사위원들의 난처함에 동의할 수 있었다.

 

물론 <트리 오브 라이프>의 이미지들은 눈부시게 아름답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이미지를 보기 위해서라면 영화관 대신 차라리 미술관에 가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 수없는 제스처들. 손짓의 단편들의 무더기. 그러나 단지 제스처들. 나뭇잎으로 시작해서 뿌리로 내려간 다음 지구의 기원에로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여행. 거의 정신분열에 가까운 여행. 그러나 그 여행은 그저 단조로운 풍경의 삽화들에 지나지 않았다. 어쩌면 장 보들리야르라면 열광했을지 모른다. 문화의 디그리 제로(零度). 하이퍼 모던의 더빙 판본. 시뮬라크라의 순환. 스펙터클의 황홀경. 그러나 제철이 지나버린 유행. <트리 오브 라이프>는 하루를 미술관에서 한가로이 거닐며 보내기를 주저하는 현대의 피곤한 여피들을 위해 편안하게 의자에 앉아서 고작 2시간18분으로 만족감을 대신하는 안도감이다.

<트리 오브 라이프>가 유럽 아트하우스 영화들처럼 장식을 늘어놓는 동안 <드라이브>는 미국 하드보일드 스타일을 흉내 낸다. 덴마크에서 태어나 뉴욕에서 자란 니컬러스 윈딩 레픈은 2004년 첫 번째 영화 <푸셔>를 찍은 다음 먼 길을 돌아서 LA에 막 도착했다. <드라이브>는 그의 8번째 극장용 영화이다. 이야기는 간단하다. 이름이 분명치 않은 ‘드라이버’는 밤에는 범죄자들을 원하는 장소까지 ‘운반하고’ 돈을 받는다. 범죄에는 가담하지 않으며 대신 5분은 어떤 경우에도 책임진다. 

그리고 낮에는 할리우드영화의 카 체이스 대역 스턴트맨으로 살아간다. 그 다음은 당신이 예상한 대로 뻔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조용하게 살고 있는 그의 아파트 옆방에 한눈에 반할 만큼 예쁜 여자가 어린아이와 살고 있다. 그리고 감옥에서 그의 남편이 출옥한다. 남편은 감옥에서의 인연이 끝나지 않았고, ‘드라이버’는 이 남편의 범죄에 오로지 그 여자 때문에 가담한다. 일은 가장 나쁜 경우의 수에 따라 풀리고, 남편은 현장에서 살해당하고, 돈 가방은 ‘드라이버’의 손에 있으며, 악당들은 끈질기게 가방을 추적한다.

<드라이브>는 <트리 오브 라이프>와 정반대의 아메리카를 보여준다. 세트장처럼 보이는 거리의 풍경. 그리고 페인트 칠 한 피자 가게와 무미건조한 모텔. 감상주의로 가득 찬 일상생활. 기억 상실증에 걸린 것처럼 과거가 없는 주인공. 뿌리의 상실. 반대로 온갖 사연뿐인 젊은 미모의 여자. 선악을 구별할 수 없는 피비린내 나는 폭력. 그런 다음 사막으로의 정처 없는 여행. 결국 사라짐. 소실점으로의 수렴. 말하자면 1970년대 아메리칸 뉴 시네마 스타일의 올드 패션. 시간은 멈춰 선 것처럼 보이고, 모든 것은 차례로 증발되어 버린다. 종종 이 영화의 고요한 침묵은 비밀스럽다기보다는 할 말이 없기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혹은 자기가 유럽영화라는 사실을 들킬까봐 미국영화인 척 시침을 떼는 것은 아닐까. 

“영화가 아메리카를 볼 수 있는 성공적인 방법은
그저 멀리서 보는 것뿐이다
종종 신화적이지만 끝없는 여행으로 이어지는 사막
이 나라에는 그러므로 희망이 없다.”

유럽의 가장 이상한 취향 중의 하나는 아메리카에 대한 끝없는 동경이다. 그들은 유럽에서 미국영화가 되고자 했다. 이를테면 누벨바그. 그리고 셀지오 레오네(와 스파게티 웨스턴). 만일 <드라이브>가 서부극을 흉내 내고 있다면 그건 마치 <세인>을 <황야의 무법자>처럼 각색했기 때문이다. ‘드라이버’가 선악을 구별할 수 없는 것은 그가 <황야의 무법자>의 ‘이름 없는 남자’의 계보에 속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라이언 고슬링은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흉내 내고 있다. 

나는 좀 더 계보를 늘어놓을 수 있다. <드라이브>는 <포인트 블랭크>를 끌어들였고, 여기에 <택시 드라이버>를 더했다. 트래비스와 ‘드라이버’는 단지 그들이 뉴욕과 LA에서 서로 다른 상황에서 다른 사건을 만났을 뿐이다. 하지만 그들은 동일한 선택을 한다. 자기를 파멸시키는 자발적인 행동. 그런 다음 <드라이브>는 장 피에르 멜빌의 ‘고독한’ <사무라이>를 따라간다. 두 영화의 차이는 파리와 LA라는 것뿐이다. 하드보일드 웨스턴 누아르. 한마디로 아메리카.

니컬러스 윈딩 레픈은 내게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아니에요, 이 영화는 동화예요. 나는 중세의 기사와 같은 주인공을 원했어요. 위기에 빠진 공주를 구하러 오는 그런 이야기. 종종 ‘드라이버’가 입고 다니는 전갈무늬의 흰색 잠바는 갑옷처럼 보인다. 하지만 반대로 이 젊은 여자가 공주가 아니라 ‘드라이버’를 완전히 파국으로 쳐넣는 ‘팜므 파탈’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게다가 이 여자는 자기가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알지도 못한다. 순정으로 넘쳐나는 멜로드라마.

나는 두 편의 영화를 보면서 아메리카는 예술의 중력을 견딜 만한 영토인가, 라는 질문을 무심코 던졌다. 테렌스 맬릭과 니컬러스 윈딩 레픈은 정반대의 자리에서 같은 대답을 들려주었다. 

그런 질문을 하지 말아주세요, 이건 그저 신기루일 뿐이에요. 영화가 그 표면을 찍을 때에는 성공적일지 모른다. 하지만 영화가 아메리카를 볼 수 있는 성공적인 방법은 그저 멀리서 보는 것뿐이다. 꿈결 같은 통속성. 종종 신화적이지만 끝없는 여행으로 이어지는 사막. 이 나라에는 그러므로 희망이 없다. 장 보들리야르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