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정성일의 영화로 세상읽기

진정성의 반격 ‘아리랑’

우리는 지금 세계와 나 사이의 ‘잃어버린’ 연결 고리를찾고 싶다는 상실감의 회복을 간절하게 시도하고 있다.나는 ‘아리랑’이 우리 시대에 진정성의 반격을 알리는 희생양이라고 한숨 쉬듯이 말할 수밖에 없다.

나는 당신을 당황시킬 생각이 없다. 하지만 지금 나는 진정성이라는 말을 꺼내들 생각이다. 진정성이라고? 비명을 지를지도 모른다. 설마! 아마도 당신은 어리둥절할 것이다. 이 말이 유행이 지나갔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게다가 이 말은 정의하기가 매우 까다롭다는 것도 알고 있다.

진정성이라는 말은 오늘날 예술에서 조롱거리이거나 이따금 상대방을 비웃을 때만 사용될 뿐이다. 진정성에 대한 냉소주의는 지식인들 카페에서 종종 마주치는 잘난 체하는 에스프레소만큼이나 만연되어 있다. ‘진짜’ 세계라는 따위는 없어요. 그저 잉여가치의 신기루가 있을 뿐이지요. 이때 우리들이 열망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그런 의미에서 역설적이긴 하지만 우리 시대보다 더 진정성의 체험을 열망했던 때가 있었을까?


김기덕의 <아리랑>을 뒤늦게 보았다. 만일 당신에게 이 영화를 볼 기회가 주어진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이 영화에 대해 쏟아진 모든 쓸데없는 소문을 빨리 잊어버리는 것이다. 칸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본 다음 쓴 대부분의 기사는 소설이거나 혹은 두세 개의 장면만을 인용한 다음 할 수 있는 대로 과장해서 만들어낸 스캔들이다.
물론 몇몇 장면에서 김기덕은 말을 빙빙 돌리지 않고 구체적으로 자기가 공격하려는 상대에게 비난을 한다. 그 상대가 영화배급사인 쇼 박스이며, <고지전>을 연출한 장훈 감독(과 프로듀서 송명철)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장면은 이 영화의 핵심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저 잠깐 지나쳐가는 대목에 불과하다.

오히려 <아리랑>을 보면서 당황하는 것은 과도할 정도로 솔직해서 처음에는 우스꽝스럽다가 그게 점점 무시무시해져가는 지경에 이르는 이 영화의 태도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까지 이웃의 비밀을 알아도 괜찮은 것일까? <아리랑>은 김기덕 자신이 연출하고, (오로지 그 자신만) 출연하고, 직접 촬영하고, 그런 다음 (아마도 노트북으로) 편집했다.
말하자면 완전한 원 맨 밴드영화. 그는 사람들의 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장소로 자기의 거취를 옮겼고, 그곳에 집을 지은 다음, 지난 겨울을 보냈다. 그 집은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집이 아니다. 내가 방문한 그 집에는 그저 지붕과 벽이 있을 뿐이었다. 가까스로 세워진 집. 몹시도 추웠던 지난 겨울을 떠올려보라. 김기덕은 집 안에 텐트를 친 다음 거기서 마치 수도를 하듯이 겨울을 견뎌냈다. 물은 얼어붙었고 난로에는 쉴 사이 없이 땔감을 넣어야 했다. 그는 이따금 먹을 것을 사기 위해 동네에 내려갔으며, 그런 다음 재빨리 차를 끌고 다시 자기 집으로 되돌아왔다. 사방에 보이는 것은 세상에 대해 방어선처럼 쌓인 눈밖에 없었다. 그 모습은 마치 자기 스스로를 벌주려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김기덕은 카메라를 세워 놓은 다음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때 그는 영화의 상상선을 이용해서 마치 두 명의 김기덕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찍었다. 나는 이것을 편의상 김기덕 1과 김기덕 2라고 부르겠다. 김기덕 1이 김기덕 2를 꾸짖는 동안 김기덕 2는 김기덕 1에게 변명을 하고 하소연을 한다. 어둠이 내려앉고 방안의 불빛은 마치 등불처럼 희미해 보였다. 차라리 불빛은 종종 일렁이면서 김기덕의 얼굴을 갉아먹는 것처럼 보이기조차 했다.
두 사람의 대화는 밤이 끝나지 않을 것처럼 이어진다. 탄식. 호소. 한숨. 슬픔. 자책. 침침한 불빛 아래 김기덕이 눈물을 흘릴 때 나는 마치 그의 얼굴에 두 개의 구멍이 뻥 뚫린 것 같은 쇼크를 받았다. 그런 다음 다시 이 장면을 모니터 화면에 올려놓고 김기덕 3이 물끄러미 쳐다본다. 김기덕은 계속해서 그 위에 겹쳐놓고 또 겹쳐진다. 그림자들의 술래잡기.

<아리랑>은 장식이 없는 영화이다. 구조도 거의 허물어져 가고 있으며, 별달리 형식이라고 할 만한 것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어떤 은유도 사용하지 않고 있으며, 이 영화가 그 무엇에 대한 상징이라고 말할 필요도 없다. 김기덕은 그저 고통스럽게 지금 여기 내가 있다, 라고 말하고 싶어 할 뿐이다. 여기 내가 있다는 말. 절실한 말. 존재하고 싶어요. 종종 이 장면들은 고백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자백이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이다.

이때 김기덕의 태도는 우리들의 난처한 두 가지 입장, 난 그걸 잘 알고 있지만 그러므로 (그걸 하지는 않을 거야) 라는 근대적 주인공과 난 그걸 잘 알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하지만 (그걸 할 거야), 라는 전통적인 영웅 모두와 전혀 다른 태도이다. <아리랑>은 난 그걸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래서 그걸 하는 거야, 라고 우리들에게 맞받아치는 중이다. 그걸 정의내리면서 슬라보예 지젝은 엄연한 윤리적 명령을 따르는 비극적 의식의 표현이라고 말했다. 나는 서투르게 이 제스처를 규정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 대신 <아리랑>을 본 다음 나는 이 영화가 불러일으킨 감정이 잘 설명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말하자면 그건 말 그대로 어떤 느낌이었다. 그걸 분석하려 들면 금방 깨져버릴 것처럼 약하고 조심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거기 담겨 있는 감정은 더 없이 정직하고, 투명하며, 솔직하고, 무엇보다도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나는 <아리랑>이 분석을 거절하는 영화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오늘날 진정성은 개념이 아니라 느낌이 되어가고 있다. 우리는 지금 세계와 나 사이의 ‘잃어버린’ 연결 고리를 찾고 싶다는 상실감의 회복을 간절하게 시도하고 있다. 물론 그건 하면 할수록 공허해지는 불가능한 몸짓이다. 정말 우리는 그걸 가져본 적이 있기는 한 것일까?
김기덕의 <아리랑>은 물론, 이라고 대답하는 영화이다.
시종일관 그는 그저 외상적 마주침에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자신의 육체를 우리 앞에 전시할 뿐이다. 악어 같은 당신들에게 내 몸을 맡길게요. 이때 외부의 적과 싸우는 척하면서 김기덕은 사실상 수없는 자기 자신들(의 실체들)과 맹렬하게 싸우는 중이다. 영화는 자살로 끝난다. 나는 <아리랑>이 우리 시대에 진정성의 반격을 알리는 희생양이라고 한숨 쉬듯이 말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