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정성일의 영화로 세상읽기

북촌방향, 당신의 자리는 어디인가

홍상수의 열두 번째 영화 <북촌방향>을 보았다. 그냥 한마디로 이 영화는 괴상한 영화이다. <북촌방향>은 그의 네 번째 디지털 영화이자, 두 번째 흑백영화이다. 많은 사람은 홍상수의 영화가 매우 단순하고 단지 배우들의 역할이 바뀔 뿐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와 정반대이다. 나는 그걸 증명할 수 있다.
첫째, 열한 번째 영화 <옥희의 영화>와 <북촌방향>은 단지 서울을 무대로 겨울에 촬영되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두 영화 사이에 아무 관계도 없다. 둘째, <북촌방향>이 얼마나 이상한 이야기인지는 이 영화를 본 다음 줄거리를 써보면 안다. 그건 당신이 요령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다. 홍상수는 촬영이 시작된 다음 매일 아침 그날의 날씨를 느끼면서 시나리오를 쓴다. 즉흥연주로 이어지는 라이브 녹음을 악보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먼저 (무리하게 요약한) 이 영화의 줄거리. 네 번째 영화를 찍은 다음 거의 영화를 만들지 못하면서 대구에 있는 대학교 영화과에서 강의를 하며 살고 있는 영화감독 성준(유준상)은 며칠 동안 서울을 방문한다(세상 속에 던져진 내기). 그는 선배(김상중)를 만난 다음 내려갈 생각이다. 이혼을 하고 혼자 사는 선배는 아끼는 후배(송선미)를 데리고 나온다(말하자면 함정). 세 사람은 어울려서 한밤중에 북촌 골목 구석에 자리 잡은 술집 ‘소설’에 가서 술을 마신다(뻔하다고? 천만의 말씀!). 이 술집의 젊은 여주인(김보경)은 매번 가게를 비워두고 손님보다 늦게 출근한다(여기서부터 이야기는 곡선을 그리기 시작한다).

성준은 마침 안주가 떨어져서 사러 나가는 여주인을 따라 나선 다음 돌아오는 한적한 길에서 키스를 한다(새로운 계열의 시작). 물론 그 사이에 계속해서 이야기 여기저기서 이런저런 사람들이 끼어든다(무한정한 분산, 사라진 중심). 성준은 전에 알던 여배우를 길거리에서 우연히 세 번이나 마주친다(접선들). 예전에 성준의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김의성)도 술자리에 슬그머니 끼어든다(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교집합). 이야기는 점점 불어나고 인물들은 각자의 선율로 자기의 삶의 박자에 따라 자신의 말과 육신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불규칙한 리듬. 카오스 안의 구조. 그 속에서 펼쳐지는 사랑의 카탈로그.


그 다음. 홍상수 자신의 <북촌방향>에 대한 이상한 설명. “처음 생각한 것은 ‘어떤 남자가 어떤 장소를 세 번 찾아간다’였습니다. 북촌 근처를 가끔 가면 매번 가는 곳에서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했던 게 맘에 걸리게 된 것이고 그게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뜨문뜨문 찾아지는 반복점들을 연결지으며 생활을 다시 그려보는 작업을 했지만 아예 통으로 반복되는 일상의 상황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어보아도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따로 발견될 것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시간적으로 이어지는 하루들인 것처럼 보이면서도 어떻게 보면 서로 상관없는 ‘첫날’ 같은 그런 하루들이 만들어졌고 그 하루들 사이를 과거의 여인과 그 여인을 닮은 여인의 충돌이란 평이한 축이 어떤 안정대를 만들면서 관통하는 그런 물건이 되었습니다….”(CinDi 영화제 프로그램 북에 홍상수 자신이 쓴 소개의 글)

부디 줄거리와 설명을 다시 한번만 반복해서 읽어주시길. 이 둘은 서로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가. 아니, 그 둘을 하나로 묶는 것이 정말 가능할까. 그런데도 홍상수는 둘 사이를 겹쳐놓는다. 이때 줄거리와 설명 사이에서 마술을 창조하는 것은 두 개의 활동이 만들어내는 능력들 사이의 힘이다. 장소와 계절. ‘북촌과 겨울.’ 이때 방점은 ‘과’에 있다. 방향을 잃은 거리는 스산하고 북촌 골목은 거미줄처럼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칭칭 동여매기 시작한다.
거미들의 활동. 낮은 짧고 금방 두꺼운 겨울밤이 시작될 것이다. 박쥐들의 이야기. 한밤중에 활동하는 박쥐들이 보내는 사랑의 초음파들. 날씨는 춥고 바람은 몸을 웅크리게 만들며 눈은 종종 기적처럼 제 시간에 도착한 편지처럼 한밤중에 혹은 대낮에 아니면 새벽에 시도때도 없이 내린다. 하지만 아무도 그 편지에 적혀 있는 사연을 읽지는 못할 것이다. 도대체 거기에 무엇을 쓴 것일까.
홍상수 영화의 가장 이상한 효과는 당신이 영화를 읽는 것이 아니라 영화가 당신을 읽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 의미도 없다고 생각한 장면에서 당신은 자신만의 잃어버린 시간의 사랑의 얼룩을 발견하고 몸서리칠 것이다. 당신이라는 목적지. (아무도) 볼 수 없는 것만이 (누군가) 볼 수 있는 것이 될 것이다. 두 개의 내기. 두 개의 괄호 중 당신의 자리는 어디인가.

자리를 알 수 없다는 말. 착시, 환영, 꿈, 기억의 또 다른 내기. 유령들의 시간. <북촌방향>을 본 다음 당신은 웃지 못할 것이다. ‘귀신들린 집’에 관한 이야기인 이 영화는 계속해서 다시 시작하고 또 시작한다. 영화는 홀린 듯이 밤이 찾아오면 그 술집에 가고 또 간다. 하필이면 그 술집의 이름은 ‘소설’이다. 그리고 그 장소에서 같은 행위를 반복한다. 되풀이. 다시 반복하기. 아무리 읽어도 같은 페이지를 다시 읽는 것만 같은 기분.
잠깐만. 기분? 그렇다. 이 정확하지 않은 상태가 영화를 보는 우리에게 매번 돌연한 각성을 일깨운다. 한 번 더, 다시 한 번 더. 성준은 자꾸만 제자리에서 맴돈다. 출구라고 착각한 입구. 아니, 입구만 존재하는 장소. 우리는 매번 영화의 첫 장면을 보는 것만 같은 착각에 빠져든다.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차이. 보충하기. 무엇을? 매번의 의미를.
하지만 우리가 맨 마지막 장면을 맨 처음 본 것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홍상수의 웃음소리. 어디 한번 의미를 찾아보세요. 우리는 술래잡기의 명수와 함께 북촌의 골목을 그림자로 얼룩진 한밤중에, 혹은 그림자 없는 정오의 대낮에 의미를 찾아 헐레벌떡 돌아다닐 것이다. 하지만 그건 당신의 그림자이다. 이미 오래전에 현자들은 의미란 자신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문득 돌아본 북촌 골목어귀 저기에 누군가 막 들어서고 있다. <북촌방향>의 영어 제목은 <그가 도착하던 날(The day he arrives)>이다. 성준은 영원히 북촌을 떠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어제 도착했고, 오늘 도착했으며, 내일도 도착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