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정성일의 영화로 세상읽기

무성영화 ‘아티스트’

영화사의 오랜 질문 중의 하나. 만일 사운드가 1927년 10월6일 <재즈 싱어>보다 10년만 늦게 도착했다면 세계영화사에 무슨 일이 생겼을 것인가? 미학자들은 영화의 시각적 테크닉이 100년은 더 멀리 갔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루돌프 아른하임. 미디어 정치학자들은 영화를 나치가 선전으로 활용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탄식했다. 폴 비릴리오. 경제학자들은 영화가 대중으로부터 그만큼 멀리 있었을 것이라고 계산했다. 더글러스 고메리. 많은 영화감독들은 거의 마지막 순간까지 토키영화에 저항했(지만 결국 굴복했)다. 채플린은 그중에서도 대표적이었다. 루돌프 발렌티노나 그레타 가르보와 같은 신화적인 스타들은 순식간에 은퇴하거나 잊혀지거나 추락했다.

미셀 아자나비시우스의 <아티스트>는 반동적인 영화이다. 모두들 영화의 새로운 테크놀로지에 홀려서 3D 영화를 만들기 위해 매달리고 있을 때 이 영화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서 1.33 스탠더드 사이즈의 흑백 무성영화를 만들었다. 마지막 장면을 제외하면 이 영화에는 대사는 있지만 소리가 없고 거의 마지못하다는 듯이 자막이 이따금씩만 나온다. 그 대신 영화에는 우아한 무성영화풍의 오케스트라 음악이 처음부터 끝까지 흐른다. 만일 당신이 원한다면 눈을 감고 음악만을 감상해도 즐거울 정도이다.


1927년 무성영화의 마지막 해, 혹은 첫 번째 토키영화 <재즈 싱어>가 발표된 해. 무성영화시대의 스타 조지 발렌틴은 어느 날 우연히 팬들에 둘러싸인 자리에서 배우 지망생인 페피 밀러와 부딪친다. 페피는 엑스트라로 조지를 다시 만나게 된다. 때마침 토키영화의 시대가 시작되고 무성영화를 고집하는 조지는 몰락하고 페피는 토키와 함께 승승장구한다. 바닥까지 이르러 자살을 하려는 조지를 구한 페피는 둘이 함께 출연하는 뮤지컬을 준비한다. 물론 해피엔딩.

이 영화가 훌륭한 건 아니지만 보는 사람을 오래간만에 아늑하게 만들어준다. 말하자면 <아티스트>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순진무구한 줄거리와 이미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는 해피엔딩을 준비하고 그 마지막 장면을 향해 종종 춤을 추듯이, 데이트를 하는 것처럼, 예정조화의 매트릭스 안에서, 이미 주어진 설정을 메워나가듯이 진행된다. 프랑스 영화감독 미셀 아자나시비우스는 할리우드 영화의 역사에 오마주를 바치는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고 있다. 제임스 ‘프랑스’ 본드 시리즈를 만든 두 편의 「OSS 117」은 1960년대 영화에 대한 가벼운 농담이다. <아티스트>는 무성영화에 대한 시각적 재치와 따뜻한 존경심으로 가득 차 있다.

주인공 조지 발레틴은 존 길버트와 더글러스 페어뱅크스의 중간쯤 되는 모습으로 등장한 다음 우여곡절을 거쳐 마지막 장면에서는 프레드 아스테어와 진저 로저스 콤비의 <톱 햇> 한 장면을 촬영하는 것만 같은 현장에서 끝난다. 에른스트 루빗치풍의 로맨스. 프랭크 보저지와 킹 비더에서 가져온 장면들은 종종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특히 <제7의 천국>에서 재닛 게이너가 남자의 옷을 껴안는 장면을 페피(베레니스 베조)가 ‘카피’하는 신은 <아티스트>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아티스트>는 유나이티드 아티스트 영화사가 워너를 거쳐 MGM영화사가 되는 이야기이다. 물론 줄거리는 <스타 탄생>의 해피엔딩 ‘반전’이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 것. <아티스트>를 보기 위해서 당신에게 무성영화시대의 교양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구태여 미학적으로 설명해야 한다면 <아티스트>는 일종의 ‘카피’ 영화이다. 이 영화가 줄거리, 미장센, 연기, 세트, 촬영, 심지어 자막에 이르기까지 새롭게 창조해낸 것은 거의 없다. 그냥 이미 만들어진 영화의 클리셰들의 장치에 복종하듯이, 혹은 마치 홀린 듯이 그저 따라갈 뿐이다. 마치 영화의 경험에 대한 자동장치라고나 할까. 단 한순간도 우리를 놀라게 만들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럴 의도도 없다. 반전도 없고 부정도 없다. 그저 <아티스트>가 주는 감흥은 그 순진함이 주는 단순함과 함께 영화도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아우라’를 만들어낼 수 있는 두께를 갖게 되었다는 신기한 상황이다.

하지만 내게 의문은 남는다. 이 영화의 제목은 <아티스트>이다. 조지 발렌틴은 ‘아티스트’인가? 영화에서 ‘예술가’의 문제는 과거의 전통을 지키려는 자들에게 부여하는 영예인가? <아티스트>는 좋았던 옛것에 대한 존경심을 품고 있다. 그건 알겠다. 그러나 그것과 어떻게 오늘날 함께 머물러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올바른 답을 주고 있지 않다. <아티스트>는 영화의 테크놀로지와 대중 사이의 연애를 외면한 ‘아티스트’의 점진적 하강에 대해서 갑자기 천상의 행복을 제시하고 있지만 거기에는 동화와도 같은 조화의 영역을 통과해서만 가능해지는 기적이 끼어든다.

여기서 조화를 부리는 것은 예술이 아니라 또다시 사랑이다. 아뿔싸! 이때 조지의 복귀는 대중의 사랑을 획득한 페피를 경유한 로맨틱한 사랑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두 개의 사랑. 덧셈과 뺄셈. 우린 대중의 사랑 없인 아무것도 하지 못할 거예요. 여기에는 어떤 굴복이 숨어 있다. 말하자면 <아티스트>를 보는 내 마음은 마치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을 다른 방식으로 보는 기분이다. “이건 ‘아티스트’가 아닙니다”라는 글자가 쓰여 있는 영화 <아티스트>. 사랑이 채워질 때 예술이 달아나고 있다. <아티스트>가 예술영화인 척 굴고 있지만 이 영화가 결국은 통속극이라는 사실을 놓치면 안된다.

미셀 아자나비시우스는 오늘날의 영화가 무성영화의 위대한 예술적 성취 중에서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를 차마 마주볼 용기가 없다. 오히려 대중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얼마나 더 영화가 충실하게 통속적이 되어야 하는지를 ‘침묵’을 통해서 ‘웅변’적으로 호소하는 영화이다. 무성영화의 위대한 시대는 끝났다. 나는 <아티스트>가 그저 잠시 동안 회고취미에 빠진 도굴꾼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