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정성일의 영화로 세상읽기

놓치면 후회할 '디센던트'


영화들이 너무 나쁘다. 종종 영화관에서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나쁘다. 때로 환호에 이끌려 가보면 거기서 재앙과 마주친다. 그 소란의 와중에서 내가 해야 하는 임무 중의 하나는 당신이 허접한 제목들을 들춰보느라 놓친 영화를 다시 일깨워주는 일이다. 나는 올해 당신이 알렉산더 페인의 <디센던트>(사진)를 놓친다면 후회할 것이라고 충고하고 싶다.

먼저 줄거리. 맷 킹(조지 쿨리니)은 하와이에서 잘 나가는 변호사이다. 그런데 아내가 갑작스러운 보트 사고로 코마상태의 식물인간이 되었다. 의사 말로는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단다. ‘이제까지 아내에게 잘 대하지 못한 것이 그저 미안할 따름이다’라고 반성하면서 어린 둘째 딸을 데리고 기숙사의 말 안 듣는 첫째 딸을 만나러 갔다가 어머니와 그동안 불화를 겪고 있던 것이 아내가 다른 남자와 불륜의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맙소사! 게다가 주변에서는 자기를 빼놓고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이다. 맷 킹은 두 딸과 첫째 딸의 남자친구를 동반하고 아내의 남자를 찾아 나선다. 참으로 한심한 여행. 이상한 동반자들.


21세기 미국영화의 새로운 질문. (한마디로) 포스트 아메리칸이란 무엇인가 혹은 ‘포스트 911’ 아메리칸이란 무엇인가라고 자문하기 시작했다. 코엔 형제, 폴 토머스 앤더슨, 데이비스 핀처는 노이로제, 강박증, 히스테리의 삼각형이라고 불릴 만한 매트릭스를 만들어냈다. 알렉산더 페인은 정확하게 그들과 같은 의미에서 미국을 탐구하지만 동시에 정반대의 자리에서 그것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재앙을 피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그는 영화를 만들면서 마치 미국의 ‘피난처’를 찾아 헤매듯이 여행한다. 네브래스카(<시티즌 루스>), 워싱턴(<일렉션>), 로키산맥(<어바웃 슈미트>), 캘리포니아(<사이드웨이>), 디트로이트와 미시건(TV 시리즈 <헝>), 그리고 이번에는 하와이로 무대를 옮겼다. 마치 로드 무비처럼 매번 떠돌지만 신기하게도 자기 동네를 벗어나지는 않는다. 말하자면 그는 동네를 기웃거리면서 이야기를 진행한다.

하와이는 천국인가? 영화의 첫 대사. “사람들은 여기가 사람 사는 데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한마디로 엿 같은 소리이다.” 왜 아니겠는가. 여기서 알렉산더 페인은 하와이의 독특한 문화를 내세우는 대신 여기도 미국 어느 곳에서나 똑같은 문제를 앓고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일깨운다. 말하자면 미국의 모든 도시는 그 자체로 미국의 환유이자 각자의 증후인 것이다.

영화 '디센던트'의 한 장면 I 출처 : 경향 DB



알렉산더 페인이 여기서 새로운 영화를 발명한 것은 아니지만 그 대신 <디센던트>는 현대영화 안에서 고전적인 방법의 우아함을 일깨워주고 있다. 이를테면 위대한 멜로드라마의 대가 레오 맛캐리를 떠올리게 만드는 1930년대적인 순간들. 부분적으로 오즈의 영화와 같은 텅 빈 쇼트의 명상. 인물들에 관한 정확한 표현, 시작하자마자 마지막 장면까지 거의 멈추지 않는 이야기의 흐름, 행동과 상황 사이를 연결하는 사건, 말하자면 형식의 위상학이 만들어낸 균형, 익살과 유머, 하지만 이 이야기가 근본적으로 비극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디센던트>를 본 다음 모두들 웃음에 대해 말하면서 코미디를 끌어낸다. 좋은 날씨의 연속된 장면들. 화창한 햇빛. 여긴 하와이다. 아마도 하와이가 이 영화의 슬픔을 감추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영화가 웃기긴 하지만 그러나 매우 비참하고 가혹한 상황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여기에는 어떻게 비극을 견뎌내는가에 관한 말 그대로의 ‘인간 희극’이 감정선을 타고 흐른다.

알렉산더 페인은 아내의 숨겨진 퍼즐을 풀면서 옛 이웃과 새 이웃의 랑데부의 영화를 만든다. 먼저 안정된 가족의 균형을 깨트린 다음 그것이 어떻게 자리를 되찾는지를 따라간다. <디센던트>의 놀라움은 그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면서 균형의 기적을 보여주는 영화라는 것이다. 그때 이 균형은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이 과정을 지나면서 각자의 삶의 깨달음을 한마디씩 꺼내들면서 만들어진다. 그게 굉장한 것은 아니지만 그 울림은 이상할 정도로 오래 간다. 알렉산더 페인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하나씩 점을 찍은 다음 우리들에게 삶의 선을 긋게 이끈다. <디센던트>는 계속해서 반전이 기다리고 있는 영화이다. 물론 그것이 당신을 놀라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 대신 이 반전들은 드라마가 아니라 삶의 선택과 관련된 것들이라 당신을 생각하게 만든다.

말 그대로 이 이야기는 살아있는 시체와 함께 하는 여행이다. 코마 상태의 아내는 어떤 변명도 내세울 수 없으며 어떤 알리바이도 없다. 맷 킹에게 남은 것은 아직 어린 두 딸과 이제 곧 결정해야 할 선조들의 유산이다. 이 유산은 하와이에 대한 그의 유일한 끈이다. 미국인이 될 것인가, 하와이안으로 남을 것인가. 거의 희미하게 이어진 두 개의 플롯이 하나로 연결될 때쯤 <디센던트>는 미처 자신이 생각하지 못했던 선물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달아간다. 말하자면 서로 교환될 수 없는 것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부등가교환을 성립시키는 고전적 기적. <디센던트>는 무언가를 포기해야만 얻을 수 있는 교환의 그 무언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선물을 주는 사람은 의도하지 않았으며, 그것을 받을 사람은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이 매개의 네트워크를 알렌산더 페인은 비상할 정도로 여유롭고 한가한 태도로 여행하면서 하나씩 연결해나간다. 포기의 흔적들. 체념의 수용. 하지만 그 선물을 받기 위한 조건. 현대영화가 잃어버린 내기.

하와이가 이따금 이 영화의 줄거리에 개입하는 것은 문득 끼어드는 하늘과 꽃과 바다와 바람과 구름의 인서트들뿐이다. 그런데 이 인서트들은 신기하게도 이 이야기의 균형을 잡아주면서 등장인물들을 인도하기 시작한다. 게다가 당신은 영화가 끝나면 자막에 올라오는 하와이 밴드들의 이름을 적느라 금방 객석에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특히 가비 파히누이. 이 영화의 노래들은 훌라춤 배경음악만을 알고 있는 당신의 귀를 번쩍 열게 할 만하다. <디센던트>는 잠시 동안 일을 멈추고 태평양을 바라보면서 당신의 마음을 열고 하와이로 여행하게 이끄는 거절하기 힘든 삶의 위로를 담고 있다. 부디 놓치지 마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