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정성일의 영화로 세상읽기

전쟁 다큐 ‘아르마딜로’가 묻는다

정성일 | 영화감독·평론가


 

1895년 12월28일 영화가 발명된 다음 언제나 전쟁이 벌어지는 곳에는 영화가 있었다. 아마도 이전의 어떤 다른 예술도 하지 않았던 역할을 영화가 하기 시작했다. 영화가 전쟁을 방문했고, 전쟁은 영화를 전시했다. 그 둘은 다소 비스듬하게 서로에게 기대어서 닮아갔다. 미디어 학자인 폴 비릴리오는 총과 카메라의 유사함에 대해서 지적했다. 둘 모두 목표물을 정한 다음 그 목표물을 자기의 초점 거리 안으로 끌어당겨서 그것을 ‘붙잡는’다. 쟁은 목표물을 공격하는 것이며, 영화는 목표물을 보여주는 것이다. 차이는 전쟁이 실용적이라면 영화는 미학적이다.


 그러나 비유적인 표현이 끝난 다음 전쟁과 영화가 실제의 장소에서 겹치게 되면서 이미지의 공급이 군수품의 공급과 등가물이 되어 군사적 지각의 병참술이라는 현대 전쟁의 새로운 무기 시스템을 만들어내게 됐다. 전략의 이미지. 전쟁의 일부로서의 영화. 그리고 이미지로서의 전략. 영화의 일부로서의 전쟁. (총을) 쏜다와 (영화를) 찍는다는 동사가 영어에서 동일한 단어 ‘shoot’라는 의미심장한 사실이 그저 우연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얼마나 많은 나라의 군대가 아프가니스탄에 갔을까? 얼마나 많은 영화가 아프가니스탄의 전쟁에 갔을까? 전쟁과 영화, 그리고 국가. 아르마딜로는 아프가니스탄에 자리한 탈레반 진영으로부터 채 1㎞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평화유지군(이라는 이름 아래 파병된) 덴마크 부대의 최전방 기지 중 하나의 이름이다. 그리고 <아르마딜로>는 이 기지에 파병된 덴마크 부대의 병사들을 6개월간 담은 야누스 메츠 페더슨의 다큐멘터리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관한 분석적 성찰을 시도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보고 난 다음 이미 알고 있는 이상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관한 그 어떤 새로운 정보를 얻거나 또는 정치적 판단을 수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병사들의 내면의 기록을 담으려고 하지 않는다. 인터뷰가 있지만 이들에게 어떤 고백을 강요하지 않는다. 이 영화의 목표는 그런 것이 아니다.


당신은 현대의 전쟁이라는 이미지를 어떻게 지각하는가? <아르마딜로>는 전쟁과 영화 사이에서 우리가 느껴보는 지각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전쟁이 진행되고 있는 현장의 어디까지 가까이 다가가 볼 수 있는지를 본다. 오늘날 전쟁의 이미지는 매일처럼 뉴스에 만연되어 있다. 점점 더 우리들은 전쟁의 이미지에 대해서 둔해지고 있다. 그러면서 점점 더 전쟁의 이미지는 스펙터클해지고 있다. 아름답게 날아가는 미사일. 압도적인 시각적 이미지의 무기들. 밤하늘을 수놓은 불꽃들. 이때 그 스펙터클은 시체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시체의 두 가지 동시적인 고백. 누가 누군가를 죽였다는 사실. 군사적인 힘들 사이의 결과. 메츠 페더슨은 점점 더 희미해지는 지각의 현장에 우리를 데리고 가서 함께 참전의 경험을 더하고 싶어 한다.





▲ “현대의 전쟁 이미지를 지각하는 우리들의 윤리에 대한 질문, 우리는 현대전의 무기가 아니다”





스크린을 보는 당신은 평화유지군과 함께 지금 여기에 있다. 같은 말의 다른 판본. 여러 종류의 다른 카메라가 덴마크 평화유지군과 함께 탈레반의 ‘표적’이 되어서 황량한 벌판에 선다. 이 영화의 촬영을 위해서 메츠 페더슨 감독은 촬영을 한 라스 스크리와 함께 “모든 경험을 함께 나누며 모든 현장에 함께 있을 것이며 모든 위험을 함께한다”는 기사의 맹세를 했다. 대부분의 디지털 극영화들이 채택하고 있는 레드 원 카메라와, 사진 카메라에 가까운 캐논 5D 마크 2, 그리고 병사들의 철모에 장착한 초소형 카메라가 출동 명령을 받으면 함께 전선으로 향한다. 전선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상 탈레반은 어디 숨어 있으며, 어디서 총알이 날아올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아프가니스탄의 전선은 사방이 열려 있는 황폐한 고원이기 때문이다. <아르마딜로>가 주는 가장 생생한 경험은 내가 지금 보고 있는 화면을 찍고 있는 사람이 언제 총에 맞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다. 그냥 간단하게 지금 영화를 보고 있는 당신이 이번 전투에서 총에 맞지 않은 것은 순전히 운이 좋은 탓이다. 혹은 누군가 당신을 대신해서 총에 맞았기 때문이다. 지구 맞은편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 신기하고도 기이하리만큼 비윤리적인 방법. 전쟁과 영화 사이의 스크린이라는 안전한 방어선. 


영화의 마지막 순간 논쟁적인 순간과 마주친다. 탈레반과 교전 중인 덴마크군은 개울가에 숨어 있던 탈레반을 사살한다. 정확하게는 수류탄을 던진 다음 달려가서 “4명의 머리통을 날려버리는” 총격을 가한다. 그런 다음 상부 보고에 따르면 “가능한 인도적인 방법으로 그들을 제거”한다. 영화는 덴마크 평화유지군이 탈레반을 사살하는 장면을 보여주지 않는다. 메츠 페더슨은 자기와 촬영 스태프들이 현장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병사들의 철모에 달려 있는 소형 마이크로 카메라에는 ‘그 장면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장면은 ‘편집’됐다. 그 대신 개울가의 시체들을 카메라 앞에 전시한 다음 전쟁이 서류에 따라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보여준다. 병사들은 지금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누군가는 ‘고통스럽게’ 자책하지만 누군가는 ‘즐겁게’ 자랑한다. 영화는 그 지점에서 끝난다. 병사들은 고향으로 귀환한다. 이상한 에필로그. 그들은 다시 전쟁에 돌아가고 싶다고 덧붙인다. 무엇이 그들을 다시 전쟁으로 끌어당기고 있는 것일까? 


그 질문은 고스란히 영화를 보는 우리들에게 돌아온다. 우리들은 왜 전쟁의 이미지를 다시, 그리고 또 다시 보고 싶어 하는 것일까? 왜 전쟁은 우리들을 끌어들이는 것일까? 그것은 전쟁을 보는 우리가 전쟁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전략으로서의 관객. 이때 전쟁의 지각을 조직하고, 관리하고, 배분하고, 확산하는 것은 현대전의 일부이다. 우리들은 전염병과도 같은 전쟁의 지각에 저항해야만 한다. <아르마딜로>는 현대의 영화가 동시대의 전쟁을 어떻게 지각하느냐를 보고 싶어 한다. 이때 핵심은 전쟁이라는 이미지를 지각하는 우리들의 윤리에 대한 질문이다. <아르마딜로>는 지각의 윤리학에 대한 다큐멘터리이다. 우리는 현대전의 무기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