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정성일의 영화로 세상읽기

배설의 갱뱅 ‘돈의 맛’

정성일 | 영화감독·평론가


 

작년 새해가 막 시작되었을 때 임상수를 만났다. 다음 영화가 무엇이냐고 묻자 “<하녀(下女)>를 찍었으니 이제 <하남(下男)>을 찍어야지요. 아, 물론 그대로 제목을 할 생각은 없고”라고 대답했다. 일 년 반이 지나서 ‘다음’ 영화 <돈의 맛>을 보게 됐다. <돈의 맛>이 정확하게 <하녀>의 속편은 아니지만 두 편의 영화는 느슨하게 이어져 있다. 영화 속에 동일한 이름을 가진 (<하녀>의) 어린 딸 나미가 어른이 되어서(<돈의 맛>) “집안에서 불에 타 죽은 하녀”를 기억해낸다. 혹은 ‘下男’ 주영작이 머리에 비닐봉지를 뒤집어쓴 채 폭행을 당할 때 홈 시사실의 커다란 스크린에는 김기영의 <하녀>가 상영되기도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임상수가 김기영의 <하녀>에 존경을 바치거나 혹은 조롱을 보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영화에는 김기영의 1960년 ‘이후’ 부르주아들의 아들딸들이, 그들의 손자손녀들이 괴물로 자라나서 지금 날뛰고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 죽어나가는 아들딸들이, 손자손녀들이 그들 발 아래서 다시 한 번 비굴하게 모욕당한다. 끔찍하게, 다시 한 번 반복해서 끔찍하게, 아마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렇게.


 


<돈의 맛>의 주인공은 비서실장 주영작(김강우)이 아니다. 그는 단지 이 집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건의 구경꾼일 뿐이다. <돈의 맛>의 진짜 ‘下男’은 이 집의 실제적인 주인 백금옥 여사(윤여정)의 남편인 윤회장(백윤식)이다. ‘가업을 이어받을’ 두 남매의 아버지이자, 사업상 해야 하는 ‘더러운 비즈니스’의 해결사이며, 빛나는 청춘을 모두 ‘돈의 맛’에 낭비한 다음 인생의 황혼에 온 남자. 그 다음 여기에 ‘필리핀’ 하녀 에바가 있다. 고국에는 남편이 있고, 두 아이가 있으며, 그 아이들을 위해서 또 다른 하녀를 두고 있다(고 말한다). 세트장처럼 세워진 이 거대한 부르주아 저택에서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자 균열이 시작된다. 그러자 갑자기 사랑의 집단적인 도미노가 이어진다. <돈의 맛>은 <하녀>의 ‘남자’ 버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대가족’ 버전이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우글거리는 괴물과 벌레들. 그래서 더 커지고 더 웅장해진 이 호화찬란한 저택은 사실상 화장실의 우아한 미장센처럼 반짝거린다. 하지만 그래봐야 여기는 똥을 누는 곳이다. ‘돈의 맛’을 보았으면 똥을 싸야 한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돈과 똥. 임상수도 동의할 것이다. 배설의 세계. 넘쳐나는 포만감. <돈의 맛>은 그 맛을 본 다음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똥을 싸는 영화이다. 돈은 이들 모두의 가장 수치스럽고 은밀하고 혐오스러운 것을 드러내고 싸게 만든다. <돈의 맛>이 지나치게 직설적인 설교와 비유 없는 장면들로만 가득 차 있다고 비판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임상수가 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변기에 앉아 있는 지루한 시간. 그런 다음 몸 바깥으로 나온 배설물을 구태여 쳐다볼 때의 낯선 불쾌감. 이 구체적인 행위 앞에서 무슨 은유와 상징이 필요할까. 그래서 <돈의 맛>은 똥을 싸는 대신 그것을 관찰하는 자리에 머물려고 필사적으로 애를 쓴다.


배설의 ‘갱뱅’이라고 부르고 싶은 <돈의 맛>은 두 가지 다른 판본으로 중단된다. 하나는 희극의 판본이다. 윤회장은 아내 백금옥 여사에게 이별을 선언하고 떠나지만 공항에서 출국 금지를 당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에바의 시체와 마주한다. 유일하게 정말 사랑했던 여자. 윤회장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 그는 자살한다. 그런 다음 관에 누워서 싱글벙글 웃는 표정으로 이 집의 파국을 즐긴다. 어쩌면 이 영화 전체에서 유일하게 성공적인 행위로서의 자살. 더 이상 ‘돈의 맛’을 볼 수 없는 절대적 자유의 권리를 얻을 수 있는 ‘돈의 바깥’의 자리. 하지만 여기가 끝이 아니다. 다시 한 번 공포의 판본이 이어진다. 에바는 죽어서 시체가 돼 고향으로 돌아간다. 돈다발 아래 죽어서 누워 있던 에바는 갑자기 눈을 뜬 다음 잡아먹을 듯이 소리를 지르면서 무서운 얼굴로 우리를 바라본다. 매장할 수 없는 시체. 남아 있는 부채.



▲ “우글거리는 괴물과 벌레들. 그래서 더 커지고 더 웅장해진 이 호화찬란한 저택은 사실상 화장실의 우아한 미장센처럼 반짝거린다. 하지만 그래봐야 여기는 똥을 누는 곳이다.”


희극과 공포를 번갈아 보여준 다음 영화는 갑자기 망설인다. 웃음과 불안. <돈의 맛>은 멜로드라마가 아니다. 두 구의 시체 사이에 놓인 불균형. <돈의 맛>에는 비극이 없다. 만일 <하녀>가 동화라면 <돈의 맛>은 우화라고 부를 만한 우스꽝스러운 교훈을 주고 싶어 한다. 교훈? 그렇다. 누구에게? 미안하지만 그건 당신이 아니다. 임상수는 이걸 부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한다. 여기에는 기묘한 하소연이 있다. 제발 그러지 마세요. 정치경제학적 투쟁의 자리에서 존재론적인 도덕의 반격에로의 환원? 임상수는 대한민국 1%의 부자들을 공격할 마음이 없다. 여기에는 연민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 영화가 우파의 도덕을 말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물론 이것은 거짓 윤리학이다.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마지막 장면은 애매하게 끝난다. 주영작과 윤나미는 에바의 관을 들고 필리핀에 있는 그녀의 집까지 찾아간다. 이들은 우리에게 ‘최소한의’ 희망을 주는 것일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주영작은 왜 혼자 ‘행동하지’ 않는가. 이 행동에 왜 반려자가 필요한가. 그 반려자가 왜 ‘주인’의 딸 윤나미인가. 그들은 결국 다시 한 번 백금옥과 윤회장의 결혼을 반복할 것이다. 몸서리쳐지도록 불안한 예감. 부르주아의 휴가에 가까운 여행길. 주영작의 인도주의적 행동을 윤나미는 ‘존중’하고 ‘후원’한 다음 그 둘은 사랑하게 될 것이다. 주인과 ‘下男’ 사이의 계급투쟁이 ‘없는’ 존중. 혁명이 ‘없는’ 후원. 왜 미래의 약속으로서의 ‘최후의 지평’을 현상 유지를 위한 ‘이해의 지평’으로 맞바꿔 쳐야만 하는가? 아마 백금옥과 윤회장도 처음에는 그렇게 만난 다음 사랑을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돈의 맛’을 보았다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우리를 기다리는 현실의 후일담.


이상한 말이지만 <하녀>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또 만들어질 것이다. 새로운 ‘하녀’들. 우울한 예언. 나는 <하녀>가 매번 실패작이 되기를 간절하게 소망한다. 아니, <하녀>가 만들어질 수 없는 대한민국에서 살고 싶다. 하지만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나라. 같은 말의 다른 판본.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 알랭 바디우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