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정성일의 영화로 세상읽기

시치미 뚝 떼고 돌아온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정성일 | 영화감독·평론가

 

 

 

수많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연대기 중의 하나. 1962년 8월 ‘마블 코믹스’에서 편집장 스탠 리의 주도로 연재를 시작한 <스파이더맨>을 영화로 만들겠다는 아이디어는 벌써 20년도 넘게 떠돌던 할리우드 뉴스였다. 처음에 거명된 사람은 제임스 캐머런이었다. <터미네이터 2>를 만든 다음 특수효과를 동원해서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기에 <스파이더맨>은 멋진 아이디어처럼 보였다. 그때는 아직 영화사에서 디지털 특수효과가 막 시작되던 시기였다는 사실을 환기해주기 바란다. 놀라운 것은 그때 <스파이더맨>은 제임스 캐머런이 3D로 준비했던 프로젝트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제임스 캐머런은 곧 기획을 포기하고 <트루 라이즈>를 만든 다음 <스파이더맨>을 완전히 버렸다. 그 다음은 리들리 스캇과 폴 베호벤이 거명됐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잘 되지 않았다. 스튜디오 사이에서 시나리오 판권을 둘러싼 긴 법정소송이 이어졌다. 오랫동안 이 기획은 할리우드에서 일종의 저주 받은 통과의례처럼 떠돌았다. 20세기는 거기서 끝났다.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자 갑자기 새로운 현상이 나타났다. 할리우드는 코믹스의 주인공들을 차례로 스크린에 초대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다시 등장하고(배트맨, 슈퍼맨), 누군가는 두 번이나 실패하고(헐크), 누군가는 마침내 도착했다. 2002년 마침내, 그리고 갑자기 샘 레이미가 첫 번째 <스파이더맨>을 만들었다. 물론 처음 <스파이더맨>이 영화로 만들어진다고 했을 때 가장 보고 싶어한 것은 카메라가 약간의 중력을 매달고 건물과 건물 사이를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면서 상하좌우로 이동하는 공간적 상승과 하강의 새로운 영화적 시청각의 체험이었다. 영화에서 테크놀로지와 시청각적 데이터베이스의 새로운 관계 설정은 21세기 영화의 스펙터클이 됐다. 고전적 아이디어와 새로운 효과의 시청각적 리믹스. <스파이더맨>은 20세기적 영화의 시각적 컨벤션의 관성과 21세기 영화의 특수효과 정보로 과잉하는 스크린 사이에서 그 둘을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정도의 긴장으로 묶어놓은 다음 기묘하게 매달려 있는 영화가 됐다.

 

물론 샘 레이미는 단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스파이더맨>은 영화사상 가장 비싼 틴에이저 무비이다. 그는 이 영화를 ‘아메리칸 틴에이저 판타스틱 로망’의 세계로 안내하는 기묘하고 불안하며 소란스럽고 우울한 데다가 다소 황당할 정도로 과장된 성장과정에서의 어른들에 대한 실망과 실패로 뒤범벅을 만들어놓았다. 물론 그럴 수 있다. 문제는 샘 레이미가 <스파이더맨>의 주인공들과 관객 사이의 유대감을 틴에이저 수준으로 끌어내린 다음 거기서 철학적 토론을 전개한다는 점이다. 주인공 피터 ‘스파이더맨’ 파커가 나는 누구인가 라고 물을 때 이 존재론적 질문을 영화 안에서 철학적으로 대면하는 대신 샘 레이미는 어떻게 이 질문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할 수 있을지의 알리바이를 만들어낸다. 어디서 질문을 중단할 것인가. 왜 이런 알리바이가 중요해진 것일까.

 

 

▲ 자아와 주체를 떼어놓는 ‘스파이더맨’
‘나는 누구인가’ 질문에 빠진 ‘어메이징’
당신은 두 명의 피터 파커 중 누구와 만나고 싶은가

 

나는 ‘마블 코믹스’ 원작 <스파이더맨>이 쿠바 위기사태로 최고조에 이른 냉전시대의 영웅으로 태어난 다음 베트남전을 통과해야만 했던 틴에이저라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싶다. 샘 레이미는 영화 <스파이더맨>을 만들었을 때 다소 창백한 표정으로 9·11 테러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새로운 냉전? 아마도 종교적 냉전. 스파이더맨이 뉴욕의 고층건물 사이를 거미줄에 의지해서 날아다닐 때 거기에는 그 빌딩들의 환상적 스크린이 외부의 실재에 의해 언제든지 찢겨져서 침입당한 실재에 의해 추락당할 수 있다는 음울한 불안이 감돌고 있다. 이라크전 시대를 살아가는 틴에이저들의 무작정 허공에 매달리기와 문득 어느 순간 추락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래서 피터 ‘스파이더맨’ 파커는 새로운 힘을 얻었다기보다는 일종의 복장도착증 환자처럼 보일 정도이다. 그는 불편해보이기 짝이 없는 거미 복장의 ‘쫄쫄이’ 레깅스 코스프레를 할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은 사실상 변신의 욕망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하여튼 미루어서 불안정한 상태를 유지하려는 가련한 노력처럼 보인다. 세상의 질문으로부터 물러날 수 있을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는 자유를 얻는 대신 포기해야 하는 그만큼의 나 안의 세상.

 

샘 레이미는 자기 질문과의 불장난에 빠져들었다. 세 편의 <스파이더맨>은 유치하고 우스꽝스럽지만 동시에 다소 무시무시할 정도로 신체를 둘러싸고 자아와 주체 사이를 찢어놓기 시작했다. 변신과 카피는 불안정하게 증식하기 시작했고, 이야기는 거의 질문의 수렁에 빠진 것처럼 불안한 스펙터클이 됐다.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은 2007년에 자기 자신이 쳐놓은 거미줄에 묶인 채 자기 질문에 잡혀 먹혔다. 컬럼비아 영화사는 이 사태를 멍청하게 구경하고 있지 않았다. 이건 세 편으로 25억달러를 번 시리즈이며, 여긴 할리우드이다.

 

각오하고 밝히는 스포일러.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은 마치 이제까지 세 편의 <스파이더맨>이 만들어진 적이 없다는 듯이 시침 뚝 떼고 만들어진 영화이다. 마크 웹은 게임 보드를 재설정하듯이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을 원점으로 돌렸다. 따분하게도 시리즈의 팬들께서는 이미 본 이야기를 다시 처음부터 복습해야 한다. 새로워졌다면 3D로 덧칠을 한 수준이다.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은 ‘버전 업’되었다기보다는 차라리 ‘재부팅’되었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간단한 비교.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 맨>이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다크 나이트>와 서로 히스테리를 느낄 만큼 가까이 있다면 지금 다시 시작하는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은 <트와일라잇>과 같은 고등학교 같은 반 동급생처럼 보인다. 그 차이는 피터 파커를 연기하는 ‘찌질이’ 토비 맥과이어와 ‘미소년’ 앤드루 가필드의 거리만큼 서로 멀리 있다. 우스꽝스럽지만 두 영화 사이의 결정적 차이. 아마도 그래서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 피터 파커는 필사적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기 위해 거미 가면을 뒤집어쓰고, 새로운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피터 파커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가면을 벗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때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나르시시즘이 된다. 이번 주말의 선택. 당신은 열등감에 사로잡힌 피터 파커와 ‘자뻑’에 찬 피터 파커 중 누구와 데이트를 하고 싶습니까? 물론 그건 당신의 취향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