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정성일의 영화로 세상읽기

공허한 퍼포먼스 ‘다크나이트 라이즈’

정성일 | 영화감독·평론가


한참을 망설인 다음 이 영화를 이야기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왜 망설였을까. 무언가 이 영화는 병들었기 때문이다. 병든 영혼과 가짜 육신 사이의 거래. 그 안에서 어떤 일관성도 보증받지 못한 채 정의의 이름으로 신체적 우울증을 치료하려는 폭력적인 힘의 예찬. 아무리 그래봐야 결국 실패할 것이다. 정의는 무능하고, 도덕주의적 분노는 무력하며, 그 사이에서 스펙터클한 투쟁들은 소란스럽긴 하지만 어둠 속에서 냉소적인 대상이 된다. 나는 니체에 관한 수사학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다. 크리스토퍼 놀런은 대안도 없이 21세기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파괴된 영웅 서사를 음울하게 노래한다.


 영웅의 의미는 무엇인가, 라는 물음과 괴물이란 누구인가, 는 사실상 같은 질문이다. 이때 둘 사이의 경계가 애매해지기 시작하면 갑자기 세상은 화음을 잃고 우울해지기 시작할 것이다. 말하자면 정의라는 문제와 윤리라는 질문. 크리스토퍼 놀런은 이미 <다크 나이트>에서 우리들과 게임을 벌였다. 배트맨이 둘 중 어느 쪽을 선택해도 비극일 때 우리들은 잔인하지만 간단하게 문제를 해결할 세 번째 방법을 알고 있다. 이 매트릭스에서 배트맨을 제거하는 것이다. <다크 나이트>는 그 과정이 흥미로운 만큼 엔딩이 지루하기 짝이 없는 곤경에 빠진 영화이다. 한참을 망설이고 <인셉션>을 경유해서 ‘놀런 버전’ 배트맨 3부작의 마지막 편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만들었다. 자, 그런 다음 당신들이 원하는 주사위를 던졌다. 물론 이 대답은 누구에게도 만족스럽지 않을 것이다. 핵심은 영웅 신화라는 세상의 방점이 사라졌을 때 당신이 느끼게 되는 공허한 실재를 견딜 수 있느냐는 것이다. 


크리스토퍼 놀런의 가장 놀라운 재능은 종종 우리들이 개념으로만 다루는 논쟁을 영화 속에서 ‘그것’을 물리적인 대상으로 만든 다음 시각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는 유럽 예술영화들이 종종 필요 이상으로 과장된 이미지와 사운드에 매달려 모호하게 ‘시네마틱’한 센스를 다루면서 오로지 느껴보라고 강요할 때 그것을 창자처럼 꺼내들어 질겁을 하게 만든 다음 우리들의 입에 가시처럼 쳐 넣어서 결국 말을 토해내게 만든다. 워쇼스키 형제가 ‘어찌되었건’ <매트릭스> 3부작을 설명하기 위해서 보드리야르를 끌어들인 다음 하여튼 지젝에게 이 영화에 대해서 말하도록 유혹했던 것처럼 놀런의 배트맨 3부작은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전개한 수많은 까다로운 사례집을 끌어들여 시나리오를 썼다는 인상을 받게 만든다. 두 개의 정의. 공리주의적 정의와 자유주의적 정의 사이의 대결.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느니 모두가 죽어버리는 편이 행복한 것이 아닐까. 놀런은 거기에 또 한 가지 가능성을 덧붙인다. 아냐, 그렇지 않아, 그걸 선택해야 할 사람만 죽으면 모두가 행복해질 거야. 기괴한 논법의 요설.






▲ “배트맨은 서사적이며 세상을 시적인 감흥으로

이끌어낼 줄 알지만 그의 행위는

세상에 대한 예술적 퍼포먼스에서 멈춘다”


이때 놀런은 이 개념적 논쟁을 눈앞에 어마어마한 스펙터클로 마치 직접적인 ‘생생한 경험’을 부여하듯이 마주치게 만든다. 종종 벽화를 연상시키는 프레임의 구도들. 만일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시각적 흥분에 한정지어서만 말한다면 우리는 왜 놀런이 이 영화를 3D로 찍지 않았는지 끝내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이 영화는 기술적으로 놀랍거나 시각적으로 훌륭하지 않다. 만일 그가 IMAX 화면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가 개념적 경험의 직접적 ‘상연’이라면 어쩌겠는가. 무엇을? 뉴욕에서 1789년 바스티유 감옥의 점령과 그리고 파리 코뮌을! 악당 베인이 주식거래장을 습격할 때 매니저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 물어본다. “당신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건가요, 여기에는 돈이 없어요.” (물론 우연의 일치겠지만) 이 장면에서 누구라도 2011년 9월17일 2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월스트리트 주코티 광장에 모인 날을 떠올릴 것이다. 그들은 돈을 구걸하기 위해 여기 모인 것이 아니다. 점령하라! 자본주의를 중단시키자! 우리에게 정의를!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어찌되었건’ 매우 과격하고 때로 혁명적인 첫 번째 포스트 9·17 영화이다. 여기가 끝이 아니다. 혁명을 모욕하지 마세요. 세상을 멈추어야 해요. 브루스 웨인과 섹스를 나눈 다음 (말 그대로) 등에 칼을 찌르는 백만장자 미란다는 ‘좋은 세상’을 믿는다. 그게 오지 않는다면 차라리 모두 죽는 편을 선택하겠어요. 혁명과 전멸의 ‘유치하지만’ 무자비한 변증법. 


좋은 소식. 이 영화의 ‘전 지구적’ 성공은 우리 시대의 대중이 여전히 철학적 논점이나 정치적 쟁점에 대해서 토론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희망적인’ 사실이다. 나쁜 소식. 하지만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논쟁은 ‘고작해야’ 여기까지이다. 샌델이 자기의 논법을 그리스 소피스트들에게서 빌려온다면 크리스토퍼 놀런은 그리스 비극의 대가들에게서 가져온다. 여기서 함께 끌려들어오는 것은 감상적 영웅주의이다. 이때 물론 작동을 멈추는 것은 정의에 대한 올바른 토론이다. 놀런은 자신의 영화가 철학이 되기 직전에 멈춘다. 배트맨은 매우 서사적이며 종종 세상을 시적인 감흥으로 이끌어낼 줄 알지만 그의 행위는 세상에 대한 예술적 퍼포먼스에서 멈춘다. 영웅의 삶의 양식에 대한 엄숙하지만 우스꽝스러운 자기의 배려. 좋은 세상과 정의 사이에서 도시공동체를 이야기할 때 영웅에게는 자기의 자리가 없다는 걸 문득 깨닫는다. 이때 그는 추방되는 대신 스스로 희생이라는 사이비 비극의 흉내를 낸다.


이제 비극이 시작되자 참고문헌은 뒤죽박죽이 된다. 디킨스의 소설, 자코뱅주의 재판. 그런 다음 코뮌과 게토의 이미지를 뒤섞는다. 맙소사. 혁명은 테러가 되고, 배트카를 뒤쫓는 미사일은 9·11을 떠오르게 만든다. 지하 감옥은 신화적이지만 죄수들의 복장은 중동의 테러리스트를 연상시킨다. 그런 다음 온갖 우여곡절의 결과가 고작해야 시민사회를 국가로 되돌려 보낼 때 배트맨은 해피엔딩인 척하는 거의 물신주의적이자 반동적 ‘코스프레’에 지나지 않게 된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정말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2011년 뉴욕이 1789년 파리에 느끼는 창백한 두려움을 담고 있다. 결과는 푸념이다. 나쁘거나, 더 나쁘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