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정성일의 영화로 세상읽기

[정성일의 영화로 세상읽기]다시 말하기 시작한 ‘피에타’

정성일 | 영화감독·평론가


김기덕의 열여덟 번째 영화 <피에타>를 보았다. 고리대금업자를 대신해서 청계천 골목에 가까스로 살고 있는 채무자들에게 신체포기각서를 내세워 보험금을 타내는 강도(이정진)는 ‘무자비’하게 자기 일을 해나간다. 그런 강도 앞에 갑자기 자기를 ‘엄마’(조민수)라고 주장하는 여자가 나타난다. 처음에는 미쳤다고 생각하고 때리고 내쫓고 학대하지만 그녀는 자기를 용서하고 받아들여 달라고 호소한다. 강도가 ‘엄마’를 받아들일 때 갑자기 ‘엄마’가 사라져버린다. 자기가 괴롭힌 채무자들 중의 누군가가 ‘엄마’를 납치했을 것이라고 믿은 강도는 자신의 채무자들을 찾아다니며 ‘자비’를 호소하기 시작한다. 이제부터 ‘무자비’와 ‘자비’의 숨바꼭질이 시작된다. 사실상 영화는 여기서 다시 시작된다.


 만일 이전까지 김기덕이라면 ‘엄마’가 사라지면서 중단되었을 것이다. 혹은 꿈에서 깨어났을 것이다. 내가 만들어낸 환상의 공백과 어떻게 함께 머물 것인가. 행위로 이행하기 전에 멈춘 다음 맛보는 소외와 무언가를 교환하려는 간절한 거래. <피에타>는 여기서 갑자기 그 거래를 중단하였다. 그런 다음 그가 중단시켰을 자리에서 절반을 접은 다음 반대의 방향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다시’ 시작한다. <피에타>는 이 절반의 자리에서 구원의 시간을 선택한다. 갑작스러운 메시아의 시간의 도래. 김기덕은 처음으로 그 시간을 기다리는 대신 그 순간을 목도하고 싶어 한다. 이때 강도는 이제까지 김기덕 영화의 주인공들이 미처 하지 않았(거나 회피했)던 고통을 마주해야만 한다. 그는 자기가 저지른 폭력의 결과를 차례로 만나야만 한다. 갑자기 김기덕은 이제까지 덮어온 환상을 추월하여 먼저 결과에 도착하고 싶어 한다. 원인은 아무리 서둘러도 결과를 잡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아무리 서둘러도 원인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여기에는 무효라는 것이 없다. 김기덕은 처음으로 ‘이후’의 시간을 다루고 싶어 한다. 책임이라는 참을 수 없는 결과. 그것을 짊어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처음에는 ‘가짜’ 엄마가 나타난다. 그런 다음 ‘가짜’는 강도의 ‘엄마’라는 빈자리를 채우기 시작한다. 그것이 모두 채워졌을 때 존재하지 않았던 ‘엄마’의 자리가 다시 원래의 빈자리가 되자 강도는 비로소 이 공백의 실존을 긍정한다. 물론 그 긍정은 자기의 ‘존재한 적이 없는’ 일부를 잘라내는 고통이다. <피에타>가 거래하는 것은 ‘엄마’라는 자리를 놓고 자본과 벌이는 기괴하고 슬픈 부등가 교환이다. 누군가는 이게 상징적으로 유치하다고 비판했다. 미안하지만 이 영화에는 상징이 없다. 그 대신 초자아의 차원에서 작동하는 법이 음모를 꾸민 다음 비합리적으로 내리 누르면서 이 모든 죄 속에 있을지도 모르는 선의의 표정을 찡그리게 만든다. 강도와 세상 사이를 다시 연결시켜놓은 다음 사라지는 매개자로서의 ‘가짜’ 엄마는 처음에는 그저 장치였지만 그 존재가 ‘엄마’라는 사실 때문에 문득 <피에타>는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이제까지 김기덕의 주인공들은 제발 자기를 이 자리에서 삭제시켜 달라고 호소하는 뺄셈의 영화를 만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여기서 반대로 덧셈의 영화를 만들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피에타>가 김기덕의 가장 좋은 영화는 아니지만 이제까지 그가 만든 영화 중에서 가장 성숙한 영화인 것만은 사실이다. 





(출처: 경향DB)


▲ “다시 한번 세상에 대한

김기덕의 애절할 정도로 간절한 하소연.

이때 말은 현실 속에 구멍을 낸 다음

그것을 열어 보이고

그 안에 있을지도 모르는 자비를 호소한다.”


무엇보다도 <피에타>가 이전 영화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그의 주인공들이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나쁜 남자>에서부터 사라지기 시작한 말은 <비몽>에 이르면서 무의미한 것이 되어갔다. 김기덕의 오랜 침묵. 세상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거리. 하지만 <피에타>는 갑자기 되돌아와 우리 모두에게 말을 한다. 세상 속으로의 혀의 활동. 말이 아니라면 어떻게 상대방에게 호소할 수 있을까? 난 모든 것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누가 누구에게? 다시 한번 세상에 대한 김기덕의 애절할 정도로 간절한 하소연. 이때 말은 현실 속에 구멍을 낸 다음 그것을 열어 보이고 그 안에 있을지도 모르는 자비를 호소한다. 말 그대로 ‘피에타’. 그러나 이 모든 행동이 자비를 구하는 것이지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환기해야 한다.


종종 <피에타>는 감정의 폭탄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떤 장면들은 스스로 주체를 못할 만큼 넘쳐나기도 하고, 자기 스스로 그 감정을 말하지 못하면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결국 말하고 만다. 심지어 그 감정들의 개념을 차례로 호명하기까지 한다. 김기덕은 어디에선가 멈출 생각이 없다. 무엇보다도 <피에타>에서 정말 살아 숨 쉬는 대상들은 청계천의 고문도구처럼 매달려 있는 기계들이다. 기계들이 활동하기 시작할 때, 그 기계들이 사람들의 손을 잡아먹을 때, 그 장면들이 갖는 힘은 전적으로 거기서 기름밥을 먹으면서 살아본 사람만이 가져올 수 있는 괴물 같은 실재의 감각이다.


마지막 장면. 자동차는 강도를 매달고 하염없이 새벽길을 달린다. 강도의 몸에서 흐르는 피가 길거리에 끝도 없이 이어진다. 그때 우리는 ‘하느님의 어린 양’을 듣게 된다. “하느님의 어린 양, 세상의 죄를 없애주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의 어린 양, 세상의 죄를 없애주시는 주님, 평화를 주소서.” 강도가 죽음으로 회개할 때, 그가 목에 쇠로 만든 목걸이를 매달고 자동차 아래로 기어들어갈 때, 그 모습이 이 영화의 첫 장면의 변주이자 반복이며, 첫 장면에서 죽은 남자의 ‘엄마’의 아들이 되고자 하는 몸짓이며(강도는 ‘진짜’ 아들의 생일을 위해서 준비했던 ‘엄마’의 스웨터를 입는다), 그 몸짓이 마치 이제 막 태어나려는 아이와도 같은 모습이지만, 그 헛된 시도가 죽음으로 끝날 때 강도는 새로운 탄생에서 실패하는 것이며, 그래서 어머니의 품에 예수처럼 죽어서라도 안겨서 다시 한번 살고자 부활을 시도하는 이 모든 노력이 물거품으로 돌아가는 그 기나긴 핏자국의 행진을 우리는 고통스럽게 지켜보아야 한다. 자비도 평화도 없는 세상. 차라리 죽어버리는 편이 나은 세상. 우리는 찬송가만으로 살 수 있을까.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그것이 실패라는 걸 뻔히 알지라도, 어떻게 그걸 하지 않으면서 세상을 견딜 수 있단 말인가. 실패라는 긍정. <피에타>는 그걸 알면서도 그걸 하는 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