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정성일의 영화로 세상읽기

[정성일의 영화로 세상읽기]‘광해’에 입장료 낸 천만이 투표함에도 표를 넣을까

정성일 | 영화감독·평론가



지난 주말(10월20일)까지 <광해, 왕이 된 남자>(사진)를 본 관객은 1천 79만 6095명이다(영화진흥위원회 통계). <도둑들>에 이어서 올해 두 번째 천만 관객영화이며, 역대 한국영화 중 일곱 번째 천만 영화이다. 이 숫자의 느낌이 잘 오지 않는다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지난 6월23일 오후 6시36분 남한 인구가 막 5천만명이 넘었다. 말하자면 남한 전체 인구 다섯 명 중 한 명이 보았다는 뜻이다. 나는 약간 다른 방식으로 이 숫자를 설명해보고 싶다. 현재 대통령인 이명박씨는 1천 149만 2389표를 얻어 대통령이 되었다. 전임 대통령이었던 노무현씨는 1천 201만 4277표를 얻어 대통령이 되었다. 투표는 입장료를 내고 하지 않는다. 영화는 입장료를 내고 보아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힘든 일은 당신의 지갑을 열게 만드는 일이다.


나는 좀 더 재치를 부려보고 싶다. 지난 여름 <도둑들>이 천만명이 넘었을 때 아무도 천만이라는 숫자와 올겨울 12월19일 수요일 대통령 선거의 결과와 연결 짓지 않았다. 그러나 <광해>를 본 다음 기괴할 정도로 이 영화를 차기 대통령에 대한 일종의 예언처럼 받아들인다. 혹은 증후라고 생각한다. 민주통합당 문재인 ‘대통령’ 후보는 10월12일 <광해>를 본 다음 “목례를 올리며 예를 취하는 허균에게 떠나는 배에서 손을 흔들며 웃던 하선을 보며 노무현 대통령이 저절로 떠올랐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무소속 안철수 ‘대통령’ 후보는 10월9일 이 영화를 본 다음 “문화 콘텐츠는 고생한 분들이 인정받는 것을 통해 보람을 느끼는 것이며, 한 나라가 이로 인해 평가받는 것은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나는 이 두 사람이 같은 영화를 본 다음 논평하는 전혀 다른 두 가지 방식이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과도하게 정감에 넘치는 주관적인 눈물과 과도할 정도로 이성적이며 객관적인 거리의 유지. 새누리당 박근혜 ‘대통령’ 후보가 이 영화를 보았다는 기사는 아직 읽지 못했다. 물론 <광해>를 보지 않은 것이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천만명이 본 영화에 대한 과도할 정도로 냉담한 무관심.


지금 모두들 신기할 정도로 <광해>를 빌려서 정치소설을 쓰고 있다. 혹은 거의 주술에 가까운 예언을 늘어놓고 있다. 그리고 이 담론들은 전술적으로 읽힌다. 물론 여기서 괄호 쳐진 것은 <광해>라는 영화 자체이다. 아마도 관객은 각자의 선택에 따라 <광해>를 보았을 것이다. 종종 <광해>의 천만명은 CJ엔터테인먼트가 CGV라는 배급구조를 동원해서 만들어낸 허구의 숫자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반론은 간단하다. 작년 겨울 <마이 웨이>의 끔찍한 실패를 어떻게 설명하겠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광해>는 훌륭한 영화인가.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는 여기서 어쩔 수 없이 2012년 가을 천만명이라는 남한 인구의 숫자를 움직인 ‘마술의 손’에 대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된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출처: 경향DB)

▲ “영화를 보기 위해 ‘자기 의지에 따라’

지갑을 기꺼이 연 천만명.

다시 5년을 맡길 대통령을 결정하기 위해 투표함에 ‘자기 의지에 따라’

도장을 찍고 넣게 될 천만명.

그러나 그 둘은 하나가 아니다.”


(따분한 말이긴 하지만) 지그프리드 크라카우어는 이 마술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사회라는 이성의 간계에 의해서 개인들 간의 관심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 전체를 움직여서 하나로 묶어내는 신비한 균형점을 이루는 순간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종종 이 침점의 순간이 나타나면 (거의 자동적으로) 이것이 앞으로 있게 될 사회적 사건에 대한 예비적 증후라고 읽기 시작한다. 말하자면 착시. 이때 여기에는 사기가 있다. 종종 이런 해석들은 영원히 자기 의지적인 행동을 미루면서 수동적으로 자기 의무를 환상에게 떠넘기고 난 다음 어떤 신비한 도약에 의해서 총체적이고 근본적인 변화로 이어지리라는 은밀한 (거짓) 희망을 설파하기 시작한다. 그런 일은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현실 속의 가능성을 누가 열어줄 수 있느냐는 질문을 해야 할 때라는 사실이다.


우리들은 논점을 바꾸어야 한다. <광해>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걸 이 영화의 줄거리 안에서 찾으면 길을 잃을 것이다. 인물들에서 찾으면 각자의 정치적 입장만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종종 <광해>를 읽어나가는 소설들은 지나치게 정치적이라기보다는 거의 왜상효과에 사로잡힌 미학적 입장처럼 보일 정도이다. <광해> 안에서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광해>가 나타난 것이다. 혹은 이렇게 말하고 싶다. <광해>는 아무것도 아니다. 문제는 이 영화를 천만명이 보았다는 것이다. 천만이라는 존재. 천만이라는 사건적 숫자. 우리는 강제로 <광해> 영화 안에 벌어진 내용과 현실 정치를 매듭지으면 안된다. 오히려 이 매듭 자체가 일종의 증후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나는 둘 사이에 아무 관계도 없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사태는 훨씬 까다롭다. (영화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읽어내는’) <광해>는 정치적으로 만들어진 ‘거짓’ 사건이다. 핵심은 이 ‘거짓’ 속에 숨어 있는 다른 가능성이다. 오히려 <광해>에서 광해군을 대신하여 가짜로 내세운 하선이라는 인물 자체가 이 헛소동의 알레고리처럼 보일 정도이다. 허구로서의 역사. 가짜의 멜랑콜리. 하지만 난 그걸 믿고 싶어요. 소설들의 정치적 간절함. 과거에 담보를 맡긴 미래. <광해>라는 ‘정치적’ 실패. (브레히트의 말을 빌려) 우리는 현실 속에서 ‘더 잘’ 실패할 수 있을까. 당신이 영화를 읽는 대신 어느 순간부터 영화가 당신을 읽기 시작한다.


이때 <광해>가 대중문화와 정치 현상의 간극 사이에 놓인 일시적인 오해의 정치학이라고 말하는 대신 우리들의 사회 시스템이 작동시키는 ‘예외적인’ 진실의 순간이라는 행간을 사후적으로 다시 읽어야 한다. 핵심은 천만명이 본 <광해>에서 새로운 정치의 출현이 가능하냐고 물어보는 것이 아니다. 영화를 보기 위해 ‘자기 의지에 따라’ 지갑을 기꺼이 연 천만명. 다시 5년을 맡길 대통령을 결정하기 위해 투표함에 ‘자기 의지에 따라’ 도장을 찍고 넣게 될 천만명. 그러나 그 둘은 하나가 아니다. 관객으로부터 시민에로, 스크린으로부터 현실로, 감상주의에 찬 환상으로부터 피와 살을 가진 새로운 세계로 어떻게 도약할 것인가. 간극의 수사학으로부터 이행의 의지에로 점핑. 이때 우리는 그 둘 사이의 간극의 행간을 뛰어넘을 (헤겔의 말을 빌리면) ‘목숨을 건’ 도약을 맞이할 것이다. 신념의 도약. 정의의 도약. 정말 그것을 원하십니까? 그날 원하는 자만이 그것을 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