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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의 영화로 세상읽기]나는 정말 스파이 영화를 본 것일까

정성일 | 영화평론가·감독



나는 스파이라는 직업을 가져본 적이 없고 스파이 친구도 없다. 그러므로 스파이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단지 내가 아는 것은 스파이에 관한 소설과 영화들에서 얻은 작은 지식들뿐이다. 종종 나는 스파이들의 세계가 그저 음모론의 일부로 꾸며낸 환상의 산물이 아닐까라는 의심을 하기도 하였다. 나이가 든 다음 좀 더 많은 스파이 소설을 읽었다. 그런 다음 한 가지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스파이는 운명이나 재능이 아니라 이것도 하나의 직업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걸 운명처럼 생각하거나 액션영화들은 종종 이걸 재능처럼 다룬다. 가끔 어떤 주인공들은 자신을 그렇게 믿는다. 이때 딜레마가 생겨난다. 왜 어느 쪽을 선택해도 자기에게 결정권이 없느냐는 것이다.


 


(출처 : 경향DB)




류승완의 <베를린>(사진)의 무대 베를린. ‘북한대사관의 무기 밀거래를 담당하던 감찰요원 표종성(하정우)은 러시아와 중동의 거래상들과 접선하던 중 자기가 함정에 빠졌음을 알게 되고 탈출한다. 이들을 감시하던 남한의 국가정보원 요원 정진수(한석규)는 비밀이 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평양에서 새로운 감찰요원 동명수(류승범)가 파견되자 주독 북한대사 리학수(이경영)는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미국대사관에 망명을 신청하고, 이 과정에 표종성의 아내이자 북한대사관 통역사인 련정희(전지현)는 내부 이중스파이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받기 시작한다. 여기에 미국 CIA와 이스라엘의 모사드가 개입한다’라고 줄거리를 소개하지만 실제로는 CIA와 모사드는 잠시 나온 다음 영화에서 연기처럼 사라지고 이야기는 순식간에 단순해진다.


스파이 소설의 대가 존 르 카레는 푸념하듯이 말했다. 아, 첩보전. 우리는 언제까지 이런 방식으로 우리 자신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이며 그렇게 하면서도 보호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회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스파이들의 세계는 어떤 방식으로건 세계의 이데올로기를 건드린다. 그물망처럼 얽혀있는 이해관계들. 기만적인 수많은 거래들. 정보와 미끼 사이에서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야만 한다. 정작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은 현장에 없고 (영화 속의 대사에 따르면) “우리는 판단을 내리는 사람이 아니라 지시를 따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왜 베를린에 모여든 것일까. 자, 알겠다. 베를린은 남한과 북한이 마주칠 만한 장소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러나 지금 베를린은 이미 통일된 독일의 한복판이며 이 도시는 더 이상 냉전의 상징이 아니다. 물론 그들은 서울과 평양에서 내려오는 지시에 따라 베를린에서 각자의 작전을 수행하는 중이다. 


그러나 서울과 평양의 끈은 희미해서 잘 보이지 않는다. (제작비와 상관없이) <베를린>은 그 무대의 설정만으로는 작은 소품 정도의 규모로 진행되는 영화이다. <베를린>은 마치 냉전의 상황에 빠져든 것처럼 위장하고 한편으로는 중동의 분쟁에 휘말려든 것처럼 과장하면서 김정일로부터 김정은에로의 권력 이양에 걸쳐 선 북한 내부의 암투가 베를린까지 번져나간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베를린에 자리한 북한대사관을 둘러싼 암투에 지나지 않는다.




(출처 : 경향DB)




▲ “‘베를린’은 신파 멜로드라마이다

하지만 나는 ‘베를린’의 진정한 스파이 버전을

지금 상상해보고 있는 중이다

국가 무의식을 보여주는 미끼로서 스파이를”


물론 나는 표종성과 련정희가 그들의 집을 포위한 북한 감찰요원들과 치고받으면서 마침내는 13층에서 떨어져내리며 유리로 된 지붕을 산산조각내는 긴 시퀀스의 액션 안무가 두 번 볼 만하다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 그런 시퀀스는 그 이후에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액션은 둔하거나 무언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마치 중간에 끝나버리거나 무언가 빠져버린 듯한 인상을 남긴다. 게다가 일단 총을 쏘기 시작하면 이상할 정도로 액션은 따분해진다. 류승완은 여전히 몸으로 치고받을 때 보는 사람이 정말 맞는 것 같은 어떤 육체적인 감흥을 불러일으킬 줄 안다. 이건 그만이 할 줄 아는 영화적 재능이다. 그러나 일단 총을 들면 그게 이상하게 장난감처럼 보인다.


난처해지는 순간은 이 영화가 시작과 끝이 서로 다르다는 걸 깨달을 때이다.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면 등장인물들은 그들 자신이 스파이라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린 것처럼 행동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들은 이 더러운 첩보전의 세계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 것일까. 


영화가 끝날 때 이 영화에는 남북한의 대립으로 비롯된 그들 자신의 운명에 대한 어떤 탄식도 없고, 그렇다고 북한의 새로운 지도자 김정은과 새로운 권력의 배신에 대한 어떤 차가운 시선도 없으며, 남한의 ‘반동적인’ 자본주의에 대해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으면서 잃어버린 희망의 전망도 없다. 정진수는 표종성에게 갑작스러운 우정의 기분을 느끼면서 그를 풀어주고, 표종성은 북한에 있는 동명수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복수를 위해 돌아가겠다고 경고를 한 다음 블라디보스토크행 비행기를 탄다. 순진하고 감상적인 결말. 이 어이없는 파토스로 넘쳐나는 엔딩 앞에서 어리둥절해졌다.


나는 정말 스파이 영화를 본 것일까. 이 영화는 어딘가에서 순환구조가 뒤집혔다. 나는 오히려 스파이들의 일상적인 현실로 돌아온 다음 그 안에서 원인과 결과를 찾아내고 싶다. 자, 결과는 무언지 알겠다. 그때 왜 이 영화는 마치 이중간첩이라도 존재하는 것 같은 호들갑을 떤 것일까. 차라리 련정희의 이중생활이 사실상 바꿔친 이중간첩의 실체라고 설명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나는 <베를린>에서 스파이들의 따분하고 단조로운 추적전 대신 차라리 부부의 위기에 관한 의심과 희생의 목소리에 경청하고 싶어진다. 만일 이 영화의 사실상의 내면적인 이야기는 표종성이 (상부의 지시를 따르기는 했지만 외교상의 접대를 이유로 다른 남자들과 불륜을 저지르고 다니는) 아내 련정희에 대한 의심을 거대한 스파이 조직의 전쟁인 것처럼 바꿔친 다음 서로가 서로에게 시련과 희생의 장부를 교환하며 용서를 빌 기회를 주는 이야기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베를린>은 표종성의 아내에 대한 의심과 그 위기가 고작해야 전부인 신파 멜로드라마이다. 어쩌면 그것이 진짜 스파이 영화의 도덕적 진공상태보다 견딜 만하기 때문에 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베를린>의 진정한 스파이 버전을 지금 상상해보고 있는 중이다스파이는 국가의 무의식을 보여주는 미끼이다. 존 르 카레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