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정성일의 영화로 세상읽기

박찬욱의 ‘스토커’는 할리우드에 보내는 예고편

정성일 | 영화평론가·감독



 

“당신은 미국에서 영화를 만들려고 애써 노력하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영화를 만들어달라고 부탁이 들어오길 기다리고 있었던 거지요.” 그러자 대답했다. “맞습니다. 그러나 나는 장소로서의 할리우드에 대해서는 전혀 흥미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내 관심은 스튜디오에 들어가 일하는 것뿐이었으니까요.” 이 말은 박찬욱이 아니라 앨프리드 히치콕이 1939년 캘리포니아에 도착해서 <레베카>를 찍은 다음 트뤼포의 질문에 한 대답이다. 아마도 이 말을 박찬욱도 알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런 심정으로 몇 번이고 이 말을 새겨가면서 박찬욱은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문제를 생각했을 것이다. <스토커>는 박찬욱이 할리우드 스튜디오에서 찍은 첫 번째 영화이다.


 


인디아(미아 바시코프스카)가 18살이 되던 날,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받는다. 아버지의 장례식이 있던 날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삼촌 찰리(매튜 구드)가 방문한다. 엄마 이블린(니콜 키드먼)은 알듯 말듯 한 표정으로 삼촌 찰리에게 친절을 베풀고 그는 별다른 이유도 없이 이 집에 머물겠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한다. 찰리는 인디아에게 과도하게 친밀감을 과시하고, 그때부터 무언가를 알 것만 같은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씩 사라져간다. 인디아는 점점 더 불안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때부터 당신이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하나씩 벌어진다.


물론 이 영화는 히치콕의 <의혹의 그림자>를 직접적으로 대놓고 끌고 들어왔으며(심지어 찾아오는 삼촌 이름도 동일하다) 삼촌 찰리로 캐스팅된 매튜 구드의 표정과 헤어스타일은 마치 <사이코>의 앤터니 퍼킨스를 데려다놓은 것만 같다. 특히 언덕에 서 있는 삼촌 찰리. 인디아는 자꾸만 지하실로 내려가고 그럴 때마다 매달린 전등을 건드려서 불빛을 흔들거리게 만든다. 물론 작정을 하면 더 많은 예를 들이밀 수도 있다. 아마 박찬욱 자신의 목록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영화보다도 <스토커>는 박찬욱 자신의 <박쥐>를 느슨하게 리메이크한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다소 유머를 허락한다면 나는 자꾸만 이 영화 제목 <스토커>가 <드라큘라>의 원작자 브램 스토커에서 가져온 둘 혹은 (<박쥐>를 포함해서) 셋 사이의 혈연관계처럼 느껴진다.




▲ “히치콕과 ‘드라큘라’와 ‘박쥐’의 그림자

나비와 거미가 얽힌 복수와 변태의 이야기

소녀 인디아의 의식과 무의식을 닮은 이상한 집

‘스토커’는 몹시 공들여 찍은, 매우 긴 예고편과 같다.”


말하자면 피에 관한 이야기. 찰리는 인디아에게 무언가를 일깨워주러 온 것이다. 피로 맺어진 동반자. 인디아는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는다. 그런 다음 결심을 해야 한다. 그 둘은 같은 종류의 인간이다. 나비가 되고 싶은 나방. 그 둘은 동일한 몸짓으로 날갯짓을 한다. 그때 인디아를 동여매는 것은 다리를 타고 올라 허벅지로 파고드는 거미이다. 나비와 거미. 거미줄을 끊고 나비는 날 수 있을까. 아니, 그보다 먼저 나방은 나비가 될 수 있을까. 소녀들이 신는 운동화를 버리고 하이힐을 신으면 될지도 모른다. 18살 생일날. 아버지가 죽고 삼촌이 찾아온다. 그때 소녀 인디아는 총을 들고 사냥을 함께한 아버지의 유언을 깨닫는다. 같은 피가 흐르는 아버지가 똑같은 환자가 아니라는 어떤 보장이 있는가. 스토커라는 집안의 무서운 이야기. 총이라는 남근. 잡아먹는 자와 잡아먹히는 자. 만일 이 모든 이야기가 인디아를 내세워서 막내를 묻어버린 둘째에게 가하는 아버지의 복수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우리는 박찬욱이 복수에 얼마나 심취했는지를 잊으면 안된다. 이 영화는 성장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곤충들 사이의 복수와 변태에 관한 이야기이다.


물론 나도 알고 있다. 이 이야기는 다소 우스꽝스럽다. <스토커>의 시나리오는 약간의 주의를 기울이면 얼마든지 공격할 수 있을 만큼 믿을 수 없게 허술하다. 아니, 차라리 말이 안된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어떤 대목은 지나치게 설명적이고, 반대로 어떤 사건은 앞뒤로 맞추면 아귀가 맞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토커>는 흥미로운 실패작이라는 아이러니한 표현이 허락된다면 나는 이 영화를 그 예로 들고 싶어진다. 박찬욱은 이야기를 비틀지 않았고, 과도하게 상징이나 은유를 인물에게 부여하지도 않았다. <스토커>를 보고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모를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범상치 않은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기 위해서 과도하리만큼 장식이 많아진다. 종종 뻔한 이야기도 마치 비밀이 숨겨진 듯한 미스터리한 구조처럼 뒤죽박죽으로 뒤섞은 교차편집이나 짧은 플래시백, 섬광 같은 인서트, 힌트를 주려는 클로즈업들, 강제적인 카메라 이동, 방마다 꽉꽉 눌러 담은 미장센들로 우글거린다. 사방팔방으로 조각조각난 시퀀스들. 하지만 박찬욱은 이 말도 안되는 시나리오를 영화로 성립시키기 위해서 거의 가련할 정도로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스토커>의 사실상의 주인공은 정확하게 이 세 명의 인물을 한자리에 불러 모은 집 그 자체이다. 이상한 집. 이 집에서 아버지가 치워지자 인디아는 어떤 방어선이 사라진 것처럼 활동하기 시작한다. 마치 인디아의 의식 상태와도 같아 보이는 집. 먼지 하나 없어 보이는 일층에 비하면 이상하리만큼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폐가처럼 먼지가 잔뜩 쌓인 채 거미줄이 드리워진 어두컴컴한 지하실, 왠지 일층에 비해서 턱없이 작아 보이는 이층, 이 세 개의 공간은 인디아의 무의식과 자아, 그리고 초자아의 서로 다른 칸처럼 보일 때가 있다. 인디아는 이 세 개의 칸을 계단을 따라 오르내리며 자기를 찾아 나선다. 하지만 아직 그녀의 엄마가 잠들었을 때 이 집을 떠나는 인디아가 무엇을 버리는지는 애매하다.


<스토커>는 첫 장면이 마지막 장면인 영화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신기한 것은 첫 장면을 본 다음 내내 영화를 보고 나서 마지막 장면을 본다고 해서 마지막 장면이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황은 정반대이다. 첫 장면을 보았을 때는 안 봐도 다 알 것만 같았던 이야기가 내내 예기치 않았던 방향으로 흘러간 다음 마지막 장면에서 어리둥절하게 끝나버린다. 하지만 그게 무얼 뜻하는지는 알 수 없다. 혹은 무언가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별게 없다. 이상하게도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몹시 공들여 만든 매우 긴 예고편을 한 편 본 기분이 든다. 그런 다음 진짜 영화는 어딘가 숨겨놓은 것처럼 그냥 거기서 문득 끝난다. 뭐랄까, <스토커>는 본격적인 영화라기보다는 박찬욱이 할리우드에 보내는 파일럿 필름처럼 보인다. 나는 본편이 보고 싶어서 박찬욱을 응원하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