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자연주의 재고

“철학자들은 이념을 생산하고 시인은 시를, 성직자는 경전을, 교수는 개론서를 생산하듯이 범죄자는 범죄를 생산한다. 만일 우리가 마지막에 언급한 생산 부문과 사회 전체 사이의 연관성을 조금 더 면밀히 살펴본다면, 우리는 우리가 안고 있는 수많은 편견을 없앨 수 있을 것이다. 범죄자는 범죄를 생산할 뿐만 아니라 형법을 생산하며, 이와 더불어 형법을 가르치는 교수와 이 교수가 자신의 강의를 상품으로 만들어 일반 시장에 필연적으로 내놓을 법학 개론을 생산한다. 게다가 범죄자는 경찰, 재판관, 사형집행인, 배심원 등을 생산한다.”

카를 마르크스는 그의 저서 <잉여가치론>에서 생산에 대한 흥미로운 생각을 보여준다. 사회를 구성하는 제반구조를 모두 생산으로 재구성한 그는 철학자를 이념생산자, 성직자는 경전생산자로 고쳐 부른다. 여기서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범죄자를 중요한 생산자 중 하나로 보았다는 점이다. 그는 범죄자가 형법, 형법을 가르치는 교수, 법학 개론, 경찰, 재판관, 사형집행인, 배심원을 생산해낸다고 말한다. 거꾸로 말해, 범죄자가 없다면 경찰, 재판관, 사형집행인과 같은 또 다른 생산구조 혹은 직업이 없어지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 역설적인 사고방식 속에서 우리는, 범죄가 결과일 뿐만 아니라 동력이라는 사실을 보게 된다. 미국 영화사 중 큰 맥을 차지하는 갱스터 영화만 봐도 그렇다. 갱스터 영화는 당시 조직화된 지하경제와 범죄와의 연루에서 탄생한 영화 장르였다. 당시 범죄 영화의 주요 소재는 세계대전 이후 북미 대륙에 넘쳐흘렀던 돈에서 출발했다. 총, 밀주, 마약 밀매와 같은 소재에서 시작한 범죄 영화는 점점 합법화된 기업으로 탈바꿈했던 검은돈의 흐름에 따라 갱스터 영화로 발전했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류승완 감독의 <부당거래>나 윤종빈 감독의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범죄는 사회의 이면이다. 범죄 없는 세상이 이상적일 것이라고 여기지만 엄밀히 말해 범죄 없는 세상은 세균 없는 공기처럼 불가능하다. 약간의 균이 면역을 키워 개체를 건강하게 만들듯, 범죄는 수많은 사회의 잉여 노동력의 수용처가 되기도 한다. 이미 마르크스도 지적했지만 청년 실업 인력이 IS와 같은 급진적 범죄 조직으로 흡수되는 것만 봐도 그렇다. 범죄가 옳다는 게 아니라 범죄란 사회경제적 모순의 곪아 터진 거울이라는 의미이다.

범죄는 한 개인의 트라우마나 이상 성격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식물이 커가는 데 적당한 온도와 습도가 요구되듯이 범죄도 사회적 환경이 키워낸다. <살인의 추억>의 1980년대 대한민국이 그랬고, <제보자>의 2005년이 그랬다. 환경과 개인의 상호 작용 속에서 범죄는 등장한다. 따라서, 범죄는 사회적 변화와 경제적 변이를 증명하는 중요한 참조사항이 되기도 한다.

영화 <나를 찾아줘>의 한 장면


▲ “환경 속 얼마든지 달라지는 인간
저금리의 빚으로 키워 낸 행복이
파멸의 씨앗이 되는 역설 속에서
다시 생각나는 에밀 졸라 자연주의”


최근 개봉한, 데이빗 핀처의 <나를 찾아줘>가 눈길을 끄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영화는 결혼기념일 5주년 아침에 사라진 아내를 찾는 스릴러 구조를 취하고 있다. 광고의 주인공들처럼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결혼 생활을 유지하던 두 남녀에게 균열이 찾아온다.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그 균열이 바로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즉 2008년도 금융위기에서 시작된다는 점이다.

여주인공 에이미에게는 집과 신탁이 있었고, 에이미와 닉의 안정적 중산층 결혼 생활은 바로 이 두 가지에 기대고 있었다. 하지만 에이미의 부모가 파산함에 따라, 그녀의 부모가 모기지로 산 집은 차압 위기에 놓인다. 실의에 빠진 부모님은 <어메이징 에이미와 변동이자 모기지>라는 책이라도 써야 할 판이라고 자조하며, 딸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모기지론, 파산에 덧보태 두 부부는 잘나가던 잡지 저널리스트라는 직업으로부터도 퇴출당한다. 불황의 여파로 실업자가 되고 만 것이다. 실직과 빚, 결국 두 사람은 뉴요커라는 세련된 별칭을 버리고 미주리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때부터 끔찍한 권태가 시작된다. 아름답고 세련된 부부를 연기하던 그들이 치정 막장극의 주인공이 된 이야기, 그 플롯의 한 가운데에 바로 2008년의 경제위기가 있는 것이다.

뉴욕에 살던 시절 부부는 쿨한 아내와 세련된 남편 역할을 맡아 이상적 부부를 연기한다. 문제는 이상적 부부의 가면이 꽤 비싸다는 것이다. 가면의 비용을 잃고 나자 부부는 실망스러운 본모습을 드러내고 만다. 가면 놀이가 옳은 것은 아니지만 이상적 결혼 생활에 약간의 연기가 필요하다는 것은 자명하다. 무엇보다, 이상적 결혼 생활에는 적정한 수준의 돈이 무척이나 중요하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결혼과 가정의 안정성을 위협하는 최고의 적은 바로 돈이다.

19세기 프랑스의 소설가 에밀 졸라는 자연주의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자연주의는 <테레즈 라캉>이라는 소설을 변호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발생했다. 에밀 졸라는 어떤 환경 속에 인간이 던져졌을 때 그 인간이 어떻게 변하는지에 관심을 가졌었다. 그는 인간의 본성이란 불변의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오히려 환경 속에서 인간은 얼마든지 달라지고, 바뀔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인물들을 난폭한 드라마 속으로 던져두고 그들의 행동을 면밀히 기록하고자 했다. 그것이 바로 에밀 졸라가 기획했던 자연주의이다.

가까스로 스스로를 연출하던 한 여자가 끔찍한 범죄 기획자가 되고, 평범한 남편을 연기하던 남자가 부도덕한 패륜아가 된다면 그것은 환경의 문제일까, 본성의 문제일까? 저금리의 빚으로 키워낸 행복이 파멸의 씨앗이 되는 역설 속에서, 에밀 졸라의 자연주의가 다시 생각나는 요즈음이다.


강유정 | 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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