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감성의 공백

평론가로 일하다 보면 예언가나 분석가의 역할을 요구받곤 한다. 이 영화 몇만명이나 들까요라는 예언적 질문들은 대개 사석에서 이뤄지지만, 이 영화의 흥행 요인은 무엇일까요와 같은 질문들은 공식적인 경우가 많다. 올여름 가장 많은 질문의 대상이 된 영화는 단연 <명량>이었지만, 여름이 지나면서 질문의 대상이 달라졌다. 키이라 나이틀리와 마크 러팔로가 주연을 맡은 영화 <비긴 어게인>에 대한 질문으로 말이다.

<비긴 어게인>은 제목 그대로 인생 제2막을 다루는 작품이다. 소재는 음악이다. 뮤지션이 되기 위해 기회의 땅, 뉴욕으로 건너왔던 영국 출신 싱어송라이터가 바닥을 치고 다시 비상한다는 게 영화의 대략적 줄거리이다. 줄거리만 보자면, 새로울 건 하나도 없다. 인생의 절정기를 거쳐 파국 직전에 이른 프로듀서가 끼어들지만 이조차도 진부하다. 영화에서 새로운 게 있다면, 실패와 재기로 이뤄진 서사적 뼈대가 아니라 중간중간 삽입된 음악과 그 감성들이다.

어떤 점에서, 이백오십만 관객을 모은 <비긴 어게인>의 흥행은 천팔백만 관객을 모은 <명량>의 흥행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명량>과 <비긴 어게인>이 여러 면에서 무척 대조적이기 때문이다. 인구의 3분의 1이 본 영화 <명량>이 조국, 충, 전쟁, 백성과 같은 이데올로기적 언어들로 가득 차 있다면 <비긴 어게인>에는 사랑, 후회, 기회, 이별과 같은 감성적 언어가 자리 잡고 있다. 말하자면, <비긴 어게인>이 대문자 이념들에 밀려 둘 곳 없었던 감성 언어에 적합한 부표가 되어 준 것이다.

<비긴 어게인>에는 실패와 배신, 이별과 같은 어두운 단어들이 등장하지만 경칩의 겨울 땅처럼 곧 끝나게 될 마지막 추위와 닮아 있다. 더 이상 추락할 곳이 없기에 이제는 비상만이 남아 있다는 반어적 희망도 영화 곳곳에 담겨 있다. 이 반어적 희망은 뉴욕이라는 공간의 힙스터적 이미지와 만나 기회로 재해석된다. 녹음할 곳이 없어도,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앞이나 센트럴 파크 호수 위의 배가 그럴듯한 배경이 되어 준다. 뉴욕이기 때문에 이러한 혼잡도 가능성의 일부로 해석된다.

영화 곳곳을 채우는 상실과 이별의 가사도 매우 사적인 감성을 건드린다. 이별이야말로 결코 대문자 담론이 될 일 없는, 가장 사적인 사건일 테다. 바보처럼 널 사랑하고, 지하철 플랫폼에 서서 마지막 한 걸음을 고민하는 청춘은 우리 영화가 오랫동안 내버려둔 감성의 사각지대라고 할 수 있다. 천만 영화, 천오백만 영화가 ‘정의’, ‘헌법’, ‘군주다운 군주’, ‘전쟁’과 같은 큰 언어를 다루는 동안 옆에 감성의 언어들이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 속에 머물고 있었던 셈이다.

영화 <비긴 어게인>의 한 장면


▲ “인생 2막 다루는 ‘비긴 어게인’
영화 곳곳 삽입된 이별 노래들
‘명량’의 이데올로기에 밀려났던
개인적·감성적 언어의 공백 채워”


천만영화들뿐만이 아니다. 최근 대대적으로 홍보를 하거나 흥행에 성공했던 한국 영화들을 살펴보면 개인의 감성을 존중하는 영화들을 찾기가 힘들다. 1990년대 말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 <번지점프를 하다>와 같은 훌륭한 감성 영화들이 있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2000년대 이후 감성 영화의 계보를 떠올리는 데에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라면 먹고 갈래요”,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와 같은 대사가 지금까지도 패러디되고, 영화 <라붐> 속 헤드폰을 끼워 주는 장면이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이유는 관객의 숫자 때문이 아니다. 이 영화들이 우리의 감성 어떤 곳을 건드렸고, 그 건드려진 감성이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그 흔적들은 거듭 재생될 수 있다.

<비긴 어게인>이 감성을 건드릴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바로 읽는 가사라고 할 수 있다. 순위 프로그램이나 음원 판매 목록에 가득 찬 음악들의 가사엔 <비긴 어게인>에 있는 감성이나 정서가 없다. 후크나 리듬이 강조된 아이돌 음악에 공감하지 못했던 어떤 감성들이 <비긴 어게인> 속 자막으로 등장하는 그 가사에 공감을 하고 있는 셈이다. 총 맞은 것처럼 아프고, 죽어도 못 보내는 직설법에 가려져 있던 어떤 감성이 “하나님 왜 젊음은 젊은이에게 주기 아까운가요”, “넌 나의 돛에서 모든 바람을 앗아갔지만 그래도 난 널 사랑했어”와 같은 문학적 가사에 흔들린다.

결국 <비긴 어게인>이 건드린 부분은 바로 이 감성의 공백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가 만들어진 북미를 넘어서는 한국에서의 흥행 성적도 이를 간접적으로 증명한다. 너무 큰 언어, 지나치게 직설적인 호소에 지친 관객들에게 감성이 머물 여백이 필요했던 것이다. 인생과 사랑, 기회와 선택을 보여주는 <비긴 어게인>의 작은 언어들이 역설적으로 무척 소중하고, 다정하게 느껴진다. 영화적으로 보자면, 지나치게 상투적이지만, 감성은 클리셰 속에서 위로받기도 한다. <비긴 어게인>에서 확인한 감성의 여백은 한국 영화가 그동안 소홀히 여겨왔던 감성의 응달이기도 하다.


강유정 | 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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