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미로와 생존

윌리엄 골딩의 1954년 작 <파리대왕>은 인간의 본성 깊숙한 모순을 드러낸 작품이다. 고립된 아이들은 이상적 해결보다는 엄포와 소문에 휩쓸린다. 나약해진 인간은 비열한 폭력으로 두려움을 모면하고자 한다. 1, 2차 세계대전을 겪었던 지성인들에게 골딩의 <파리대왕>은 곧 당시의 자화상이었다.

반세기가 지나 <파리대왕>이 다시 언급되고 있다. 북미권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헝거게임>, <다이버전트>와 같은 베스트셀러들 때문이다. 주요 등장인물들이 10대라는 점도 흥미롭다. 독자층 역시 10대들이 대부분인데, <해리포터>와 함께 유소년기를 보낸 10대들이 다음 읽을거리로 선택한 것으로 분석된다. <해리포터> 시리즈처럼 이 소설들 역시 10대들에게 얻은 인기를 토대로 속속 영화화되고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이러한 소설 원작 영화들이 하나같이 생존 서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파리대왕>이 환기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10대 베스트셀러들은 하나같이 고립과 생존을 모티브로 진행된다. 곧 개봉하게 될 <메이즈 러너>만 해도 그렇다.

한 달에 한 명씩 엘리베이터 속 상자에 갇혀 소년이 ‘배달’된다. 자신의 이름 외에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소년들은 자신들의 주거지를 ‘글레이드’라고 부르며 살아간다. 글레이드의 외부는 미로로 둘러싸여 있다. 정해진 시간에 문이 열리면 러너들이 미로를 탐색하고 돌아온다. 탐색은 한다지만, 사실상 포기한 지 오래다. 미로에는 ‘그리버’라고 불리는 괴물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소년 토마스가 규칙을 어기고, 출구를 찾기 시작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말하자면, <메이즈 러너>는 출구를 찾는 모험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정작 눈길을 끄는 것은 소년들의 모험이 아니라 미로이다. 영화 곳곳에 암시되어 있듯이 미로는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인공물이다. 그런데 인공물이라고 하기에 미로는 지나치게 비윤리적이고 난폭하다. 미로 바깥을 어슬렁거리는 그리버는 소년들의 생존 학습용 도구라기에 너무 잔인하다. 소년들은 바깥 세계를 탐구하다가 실패하면 벌점을 받는 게 아니라 목숨을 잃는다. 학습의 성취가 생존이고 징벌이 곧 죽음이다. 학습이 시행착오를 기반으로 하는 실패의 반복이라면 여기에선 허용되지 않는다. 실패하면 목숨을 뺏긴다. 아이들은 이유도 모른 채, 목숨을 걸고 탈출을 감행해야 한다.


▲ “출구 찾기에 실패 땐 목숨 잃는 미로
무차별 생존 경쟁에 던져진 소년들
‘메이즈 러너’ 속 공간은 현실의 은유
맹목적 질주 대신 ‘왜’라는 질문을”


주목해야 할 점은 이러한 무차별적인 생존 학습 서사에 10대 독자, 관객들이 공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헝거게임>이나 <다이버전트>도 생존 게임 서사라는 점에서 거의 다를 바 없다. 누군가 어른이 잔혹한 게임 공간을 만들어내고 아이들은 목숨을 건 채 그곳을 이겨내야 한다. 그런데 아무도 게임에 의심을 품지 않는다. 아이들이 죽어 나가는데도 그것은 단순히 개인적 불행일 뿐이다.

아이들은 이유도 모른 채 극심한 생존 경쟁에 던져지고, 적자만이 그들의 동료가 되고, 최종 생존자는 영웅으로 대접받는다. 이 무시무시한 허구적 세계의 개연성에 대해 10대 독자들은 오히려 환호한다. 회를 거듭할수록 게임은 더욱 잔인해지고 목숨은 더 쉽게 달아난다. 그런데도 왜 이런 생존 게임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보다 살아남는 게 우선이다.

아이들을 던져놓고 무조건 살아남는 게 성취라고 말하는 영화 속 공간은 안타깝게도 우리의 정서에도 낯설지 않다. 입시와 취업의 패러다임 속에서 살인적 스펙 쌓기에 시달리는 우리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것은 우리 역시 왜 생존해야 하느냐 묻지 못한다는 것이다.

푸코 식으로 말하자면 에피스테메 자체를 묻지도 못한 채 무조건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무조건 대기업에 취업해야만 한다. 왜라고 묻고, 어떻게라며 머뭇거리는 순간 그리버가 다가와 목숨을 빼앗을지 모른다.

빼앗는다는 사실보다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이 더욱 큰 공포가 된다. 미로가 학습 공간이라면 다시 리셋해서 시도하면 되지만 미로가 곧 생존 여부가 나뉘는 전장이라면 리셋은 없다. 한번 실패하면 기회는 없다. 생존하기 위해선, 경주마처럼 옆눈을 가리고 출구만을 향해 뛰어야 한다. 왜 뛰어야 하는지, 무엇이 나를 채찍질하는지 물을 겨를이 없다. 공포는 맹목적 질주의 연료가 된다.

영화 <메이즈 러너>에서 미로를 만든 음모자들은 이렇게 속삭인다. “우리는 옳은 일을 하고 있는 거야.” 주술처럼 반복되는 이 이야기는 오히려 거꾸로 들어야 맞는 것으로 보인다. “옳은 일이라고 강조해야 할 만큼, 사실 이 일은 옳지 않아”라고 말이다. 훌륭한 대의명분이란 역설적 고백에 불과하다.

적어도 20세기의 파리대왕은 우연한 사고 가운데서 발견된 ‘악’이었다. 하지만 21세기의 파리대왕은 누군가 만들어놓은 미로 안에 던져진 아이들 가운데서 발명된다. 누가 만든 미로이고, 누가 미로 속에 아이들을 밀어넣고, 누가 과연 혜택을 얻을까? 질문이 절실한 때이다.


강유정 | 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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