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폭력과 서사의 주객전도

태초엔 삶이 있었다. 이야기보다, 그림보다, 노래보다 먼저 삶이 있었다. 누군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어떤 이야기꾼은 눈뜰 때부터, 눈감을 때까지 일어난 모든 일을 이야기하려 했을 것이다. 다른 이야기꾼은 가장 재밌는 부분을 강조하고 나머지는 뺐을 수도 있다. 우리가 “서사”라고 부르는 이야기하기의 방법은 인류가 우리의 삶을 이야기로 전달하기 위해 고심한 끝에 나온 최적화된 모델이다. 이야기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듣는 사람의 관심을 끌기 원한다.

영화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이야기도 있지만 볼거리도 있기에 어떤 볼거리를 제시하느냐에 따라 관람의 재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볼거리와 이야기의 황금비율, 어쩌면 이게 현대 영화의 성패를 좌우하는 관건일지도 모르겠다. 최초의 영화 <기차의 도착>이 알린 영화의 새로움은 바로 기술적 혁신에 바탕을 두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야기보다 볼거리가 앞설 때, 영화는 포르노그래피가 된다. 반드시, 여자와 남자의 벗은 몸이나 섹스신이 등장해야만 외설은 아니다. 무차별적 폭력이나 잔인한 폭행이 이어지고, 의미 없는 기술 박람회 수준의 특수효과만이 범람할 때, 영화는 포르노그래피가 된다. 포르노그래피가 성욕을 자극한다면 무자비한 액션 영화는 폭력성을 자극한다. 감각의 역치를 높이는 데만 집중할 때, 이야기는 증발하고 본능만이 부유한다.

최근 본 두 편의 영화는 영화의 외설 지향을 더욱 우려케 한다. 첫 번째 외설은 바로 <트랜스포머>이다. 2시간46분에 육박하는 거구는 유려하게 변신하는 로봇 자동차의 이미지에 전적으로 기대고 있다. 외계 물체 ‘트랜스포머’를 지구인과 연결해주던 연약한 서사적 끈은 바로 샘 윗위키와 범블비의 우정이었다. 주인공 샘이 영화에서 하차하면서 그나마 간직했던 서사의 끈도 사라졌다. 새로운 편부슬하 가정이 등장하긴 했지만 가족의 소중함이라는 전통적 할리우드의 가치관과 변신 로봇 자동차의 우정은 희박하다 못해 억지스럽다.

억지스러움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서사적 가치의 전도이다. 우정을 위해 지구에 남았다고 하지만 구체적 사례가 사라진 우정은 공허한 캐치프레이즈와 다르지 않다. 우주적 절대선인 옵티머스 프라임은 국제법도 지켜지지 않는 마당에 우주적 윤리를 설파한다. 서사의 역사는 이런 추상적이고 불투명한 보편성을 극복하면서 발전해 왔다. 그냥 우정이 아니라 피노키오와 제페토 사이의 우정이고, 어린 왕자와 여우 그리고 장미가 맺는 특별한 사건 속에서 개별성이 빚어졌던 것이다.

말하자면, <트랜스포머>는 로봇 변신의 구실로 인간 조연을 요구한다. 주객이 전도된 셈이다. <트랜스포머>에는 각각의 로봇 캐릭터가 있을 뿐, 문제적 인물은 없다. 캐릭터를 소개하기 위해 사건이 발생하고, 주요 고객인 중국 관객을 만족시키기 위해 중국에 가야 한다. 이야기의 개연성은 상업적 이익 앞에서 가볍게 무시된다. 큰 고객이 좋아하는 요소를 잔뜩 넣어주는 게 필연성이다. 그러니, <트랜스포머>는 포르노그래피이다.

<트랜스포머4>(위)와 <신의 한 수>


▲ “여자·남자의 벗은 몸이나 섹스신이 등장해야만 외설은 아니다
무차별적 폭력이나 잔인한 폭행이 이어지고,
기술 박람회 수준의 특수효과만이 범람할 때,
영화는 포르노그래피가 된다”


문제는 이런 경향이 비단 할리우드에 한정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할리우드가 돈과 기술을 앞세운 외설을 보여준다면 한국 영화는 다른 방식으로 외설 지향적이다. 가령, 최근 개봉한 영화 <신의 한 수>만 해도 그렇다. <신의 한 수>는 바둑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내기 바둑의 세계에 들어선 기사가 잔인한 상대를 만나 형을 잃는다. 기사는 절치부심의 시간을 거쳐 복수에 나선다. 영화는 패착에서 시작해 계가에 이르기까지 그 과정을 바둑 용어에 빗대 전개된다.

내기 바둑이 갖는 도박의 특성 때문이겠지만, <신의 한 수>는 <타짜>와 비교되곤 한다. <타짜>가 앞으로 보나, 뒤로 보나 도박인 화투 이야기라면 ‘바둑’은 일간지에 실리는 프로, 아마 세계부터 지린내 나는 뒷골목 내기 바둑의 세계까지 있다는 점에서 좀 더 다채롭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두 영화의 가장 큰 차이점은 종목이 아니라 공포의 질감이다.

영화 <타짜>에서 가장 무서웠던 것은 칼이나 총과 같은 흉기가 아니라 바로 사람이었다. 평경장의 죽음에 얽힌 비화나 정마담이 가진 서슬 퍼런 독기에 담긴 욕망의 잔인함 말이다. 차비를 챙겨줬더니, 그걸 들고 다시 도박판에 앉는 점잖은 교수나 배가 타서 가라앉는 순간까지도 마지막 패를 들고 혼란스러워하는 아귀는 화투판에서 지는 것이 두려운 게 아니라 화투라는 판 안에 집결된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끈적하고 무서운 것인지 보여준다.

반면, <신의 한 수>에서 바둑알은 흉기로 변신한다. <타짜> 식으로 변형해보자면, 화투패를 썰어 씹어 삼키고, 화투패를 날려 이마에 꽂는 장면들이 등장한다. <신의 한 수>에서 무서운 것은 인간의 욕망이 아니라 이기고 지는 것, 승패 그 자체이다. 단적인 예로, 태석이 감옥에서 연마하는 것도 바둑이 아닌 싸움이다. 바둑 영화이지만 바둑은 치열한 몸싸움으로 가는 교량에 불과하다. 바둑으로 승부를 걸지만 그 결과는 늘 칼싸움으로 결정된다. 진짜 승부는 액션이지 바둑이 아니다.

<신의 한 수>의 전체적 짜임새도 그렇다. <신의 한 수>에서 기둥은 정우성이 보여줄 액션이지 그 사이를 채우고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막상 태석이 어떤 인물이며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어떤 사연으로 바둑판에 오게 되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바둑판 위의 검은 돌, 흰 돌처럼 그들은 각자의 행마를 지킬 뿐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잔인한 액션이 바로 한국 관객이 좋아하는 강렬한 자극제라는 점이다. <표적> <끝까지 간다> <우는 남자> <하이힐> <황제를 위하여>와 같은 작품들을 보면 소재나 배우가 다를 뿐, 하나같이 잔인하고 하나같이 다른 액션에 치중한다는 점에서 같다. 이야기는 본 듯하지만 액션만이 새롭다. 하지만 이 역시 포르노그래피가 아닐까? 필연적으로 잔인한 폭력이 등장하는 게 아니라 폭력을 위해 이야기가 살집이 되어 주는 영화. 영화가 점점 외설적이 될수록 어쩐지 영화 보기는 점점 더 피로해진다.


김유정 | 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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