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상상력의 원천

상상력이 폭발하는 시기가 있는 듯싶다. 1990년대가 그랬다. 워쇼스키, 레오 카락스, 쿠엔틴 타란티노, 왕가위와 같은 감독들은 이전과 확연히 구분된 상상력의 질감을 선보였다. 벨 에포크 시대도 그랬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아우르는 이 시기에 새로운 상상력의 징후들이 솟구쳤다. 한국 문학사의 1990년대도 비슷했다. 김영하, 윤대녕, 백민석과 같은 작가들이 낯선 감수성과 스타일로 독자를 두드렸다. 새로운 것의 재충전, 낯섦이야말로 문화적 진보의 증표라고 할 수 있다.

5월 말, 가장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는 바로 <엑스맨>의 새로운 시리즈물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이다. 최근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의 상영 패턴을 보자면 활주로가 연상된다. <캡틴 아메리카>에 이어 <스파이더맨 2> <고질라> <엑스맨>에 이르기까지 한 주를 간격으로 대작들이 연착륙한다. 이 영화들의 공통점은 우선 어마어마한 출연진과 기술 축적형 고예산 영화라는 것이다. 각각의 작품들은 최신 시각 기술의 박람회장을 방불케 한다.

두 번째 눈에 띄는 현상은 이 모든 영화들이 오리지널 시나리오 작품이 아니라는 것이다. 최근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작품들은 코믹스(만화)나 과거 상영작을 원작으로 삼고 있는 경우가 많다. 각색이거나 리메이크인 작품이 많다는 뜻이다.

상상력의 원천을 찾아가자면 1960년대가 자리잡고 있다. <스파이더맨>을 비롯해 <고질라> <엑스맨>의 원작들은 1950년대 혹은 1960년대 만들어졌다. 최근 할리우드에서 자본과 기술을 투자해 만들어내고 있는 이야기의 원천이 바로 1960년대에 있는 것이다. 비록 영화 속에서 재현되는 액션이나 이야기의 소재는 최신의 것이라 해도, 상상력의 원천은 50여년 전의 과거에 있다. 괴수나 영웅 장르물의 시작이 바로 이때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1960년대일까? 1960년대는 비틀스와 히치콕 그리고 아폴로 11호로 환기된다. 2차 세계대전 후 급성장한 대중문화가 기억의 한 축이라면 다른 한 축에는 과학기술의 비약적 성장이 놓여 있다. 1812년 증기기관차가 발명된 이후 약 150년 만에 인간이 직접 달을 딛고, 원폭이 실제 사용되기까지 했으니, 과학은 기대와 두려움을 동시에 가져다주기 충분했다. 기대와 두려움은 상상력을 자극했다. 이를 방증하듯 이야기와 캐릭터에 대한 상상력이 쏟아졌다. 스탠리 큐브릭의 역작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가 탄생한 시기도 1968년이다.

그런 속도와 기대감을 생각해보자면 50여년이 지난, 현재 우리가 직접 만나게 된 ‘미래’는 과거의 기대나 두려움과는 사뭇 다르다. <블레이드 러너>가 우울하게 예측한 2019년은 고작 5년 남았지만 그 불길한 예감이 실현될 것 같진 않다. 2000년이 지난 이후, 우리가 걱정했던 미래는 과학기술의 진보가 남긴 부작용과 흉터들이었다. 하지만 디스토피아는 다른 면에서 현실화되고 있다. 과학이 아닌 인간적 결함들 즉, 정치, 사회적 체계의 미완과 도덕적 결핍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는 세계, 그런 디스토피아에 살고 있는 것이다.


<엑스맨 :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의 한 장면.

어쩌면,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에는 계몽 이후에 대한 두려운 설렘이 자리잡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비관론에는 적어도, 시민사회나 민주주의의 도래와 같은 오래된 과거의 문제로 인한 시련은 없었다. 인류의 명민함, 욕망이 가져온 디스토피아의 상상력에는 그래도 인류가 계속 한 걸음씩 진보해 발전해 나가리라는 기대감이 자리잡고 있었다.

2014년, 지금도 우리는 1960년대의 상상력에 기대고 있다. 거꾸로 말해, 2014년 우리는 지금에 걸맞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비록 배우나 감독들이 1970년대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이고 그 영화적 기술은 2010년 이후 발명된 최신의 것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어쩌면 우리는 동시대적 캐릭터와 이야기를 고안해내는 데 한계를 느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기술은 발전했지만 상상력은 과거로부터 더 나아가고 있지 못하는 것이다.

<매트릭스>나 <아바타>의 등장에 쏟아진 환호는 기술적 세련됨에 대한 것만은 아니었다. 두 작품에는 1990년대와 2000년대가 배양한 고유한 아이디어가 자리잡고 있다. 중요한 것은 초고속촬영이나 3D 이모션 캡처가 아니라는 뜻이다. 수십억의 관람객이 공유하는 상품에 현재의 상상력이 부재한다. 어쩌면 우리는 상상력의 결핍 상태에 놓여 있는지도 모른다.

지나친 고비용 구조도 문제이다. 상상력은 여러 번의 실패를 거쳐 결실을 맺기도 한다. 상업성과 상상력은 아주 먼 거리에 놓여 있다. 언제까지 1960년대의 상상력을 숙주로 기술적 변주만 할 수 있을까? 클래식과 변주, 원작과 재활용 사이에 상상력과 도전을 부정하는 위험한 상업 논리는 없는지 살펴볼 일이다.



강유정 | 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